지난 19일 대구 수성구 수성아이스링크에서 대구의 A급 쇼트트랙 선수들이 훈련을 하고 있다. 사진=이효설기자
지난 19일 대구 수성아이스링크에서 대구의 쇼트트랙 꿈나무들이 훈련을 하고 있다. 사진 =이효설기자
대구 북구 대구시민운동장 내 실내빙상장 인근에는 대구 빙상 선수들과 코치가 사용하는 사무실이 마련돼 있다. 노후화된 공간 한켠에 선수들이 몸을 풀기 위해 타는 낡은 사이클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사진=이효설기자
2026 밀라노·코르티나 담페초 동계 올림픽에 대구·경북은 없었다. 빙상·설상 그 어디에도 대구의 딸과 경북의 아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23일 지역 체육계에 따르면 이번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우리 국가대표 선수는 모두 71명이지만, 대구·경북 소속 선수는 단 한 명도 없다.
김소희·안상미·진선유 등 수많은 빙상의 전설을 배출하며 동계 스포츠의 메카로 이름을 날렸던 대구의 몰락은 예고된 사태라는 게 빙상계의 시각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해 제106회 전국동계체전에서 대구는 빙상 등 6개 종목에 참가했지만 종합 9위에 머물렀다. 경북 역시 11위로 부진했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대구가 빙판 없는 '빙상도시'라는 사실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몰락의 가장 큰 원인은 처참한 인프라다. 대구 유일의 국제 규격 빙상장이었던 대구실내빙상장은 1995년 개장했다. 2024년 말 지붕 구조물이 휘어 안전등급 D판정을 받았고, 현재까지 리모델링 없이 방치돼 있다. 갈 곳 잃은 선수들은 새벽 버스를 타고 창원·부산 등을 전전하는 '빙상 난민' 신세로 전락했다.
열악한 환경은 유망주 유출로 이어졌다. 대구 오성고 출신으로 2025 아시안게임 2관왕에 오른 스피드 스케이팅의 장성우는 고교 졸업과 동시에 화성시청으로 떠났다. 대구에는 장성우를 받아 줄 실업팀도, 지치도록 훈련할 400m 정규 링크장도 없기 때문이다. 30여 년 전통의 경신중·오성중 빙상부가 올해 특기생을 받지 않는 등 학교 빙상부도 뿌리가 뽑힐 직전까지 와 있다.
◆'빙상 난민'이 된 대구 선수들
지난 19일 오후 8시30분 대구 수성아이스링크장. 대구를 대표하는 쇼트트랙 선수들이 초보자·동호인들과 한데 뒤엉켜 훈련하고 있었다. 가로 45m×세로 22m 크기의 아이스 링크에는 어림잡아 50명이 넘어 보였다. 국제 규격(60m×30m)에 훨씬 못 미치는 시설 탓이다. 쇼트트랙의 핵심인 '코너링 기술' 훈련은 언감생심이다. 선수들에게 허용된 훈련시간은 단 한 시간. 밤 9시부터는 초등부 아이스하키 동호인들의 대관 예약으로 자리를 내줘야 한다. 축구로 치면 정규 구장이 아닌 풋살장에서 국가대표 훈련이 진행되는 셈이다.
김형욱 쇼트트랙 코치는 "(선수들이) 스케이트 탈 빙판이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1년 전을 회상하며 진저리를 쳤다. 전국빙상종별선수권대회를 20일 앞두고 대구시민운동장 내 실내빙상장이 갑자기 운영을 중단한 것. 대구 유일의 빙상장이 문을 닫은 것이다. 안전성 평가에서 D등급을 받아 리모델링에 들어간다는 게 이유였다.
김 코치는 "학생 선수들에게 대회는 메달이고, 메달은 곧 대학 진학이니까 3주만 더 있다가 문 닫으면 안 되겠느냐고 애원했지만 허사였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이어 그는 "날벼락이었지만 대회 준비를 해야 했다. 새벽 3시에 버스를 타고 부랴부랴 경남 창원에 있는 링크장으로 떠났다. 선수, 학부모, 코치 모두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고 했다. 그 후 최근까지도 주 3일은 빙상장을 찾아 부산, 경기 화성 등을 버스로 오가며 훈련을 이어가고 있는 게 대구 쇼트트랙 선수들의 현실이다.
대구시는 오는 3월 동구에 조성된 제2빙상장의 임시개장을 앞두고 있다. 국제 규격 링크장이지만, 선수들의 실외 훈련공간이 마련되지 않았다는 얘기가 들려온다. 엘리트 선수는 사이클·러닝·순발력 훈련 등이 중요한데, 부대시설이 없어 반쪽짜리 경기장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게다가 지난해 운영을 중단한 제1빙상장은 아직까지도 리모델링 공사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
이 같은 인프라 문제는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북구 고성동 빙상장에서도 선수들이 새벽이나 심야에만 대관할 수 있는 열악한 환경이 반복되고 있다. 피겨·쇼트트랙·스피드스케이팅 등 여러 종목이 빙상장을 나눠 써야 하며, 시민 개방 시간까지 겹치기라도 하면 선수들의 훈련시간은 부족할 수밖에 없다. 김 코치는 "서울·경기지역엔 링크장이 20~30개 된다. 그런데 대구는 딱 한 곳이니까 개보수하면 다른 지역으로 가야 한다"며 "(선수들이) 학교에 출석해야 하니까 타 지역에서 체류도 할 수 없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 동계스포츠 메카였는데 어쩌다…
사실 대구는 1990년대 들어 서울·경기·강원과 함께 동계 스포츠 4강을 이뤘다. 수도권에서 대구 빙상의 선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올 정도였다. 특히 정화여고·경신고·계명대는 소위 '빙상사관학교'라 불릴 만큼 대구 빙상의 핵심축이었다.
황금기의 첫 주자는 1994년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정화여고 김소희 선수. 김 선수는 쇼트트랙 여자 3000m 계주에서 금메달을 획득하며 대구를 세계에 알렸다. 이어 1998년 나가노 동계올림픽에선 안상미가 금메달을 따며 '대구의 스타'로 떠올랐다.
2000년대엔 대구 출신이 쇼트트랙으로 세계를 지배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국대회에서 대구 대표팀이 서울팀을 위협하던 시기로, 당시 배출된 선수들이 훗날 한국 쇼트트랙의 '전설'이 됐다고 빙상 지도자들은 입을 모은다. 2006년 토리노 올림픽 3관왕 진선유는 경북여고 시절 전국을 제패하는 등 '천재 소녀'로 통했다. 2002 솔트레이크, 2006 토리노 올림픽 계주 금메달에 빛나는 최은경 등 대구 출신의 명성은 계속 이어졌다.
2010년대엔 경북 의성을 중심으로 '컬링 열풍'이 불었다. '안경 선배' 김은정 선수를 필두로 이곳 출신 선후배들이 결성한 '팀킴'은 2018 평창 올림픽 은메달 신화를 썼다. 또 정화여고 출신 김보름(스피드 스케이팅)은 당시 매스스타트 은메달을 획득했다. 1500m에서 금메달을 딴 임효준(쇼트트랙) 역시 대구 계성초등을 졸업한 대구의 아들이었다.
◆유망주 탈대구…학교 빙상부 소멸 위기
그 사이 빙상 유망주들은 짐을 쌌다. 특히 쇼트트랙 종목 경우, 잘 타는 형이나 누나들이 함께 타면서 어린 선수를 키우기도 하는데, 많은 선수들이 서울·경기의 양호한 훈련시설과 우수한 지도자를 찾아 떠나면서 대구 빙상의 훈련 여건은 더욱 나빠지고 있다.
23일 대구 빙상계에 따르면 경신중과 오성중 빙상부는 올해 체육특기생을 받지 않았다. 수십 년 전통의 학교 빙상부가 문을 닫기 시작한 것. 최근 경신고 빙상부 경우, 선수 일부가 인라인으로 전향하거나 운동을 포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구에 남아 있는 학교 빙상부는 정화여고, 칠성고, 경신고 정도다.
◆"선수 받아줄 대구 실업팀도 없어요"
2025 하얼빈 동계 아시안게임 '2관왕'에 빛나는 장성우 선수의 사례는 대구 빙상의 현주소를 그대로 보여준다. 2024년 오성고를 졸업하자마자 경기도 화성시청 빙상단에 전격 입단했다. 당시 장성우는 스피드스케이팅 '고교 최강자'로 대구 빙상의 자존심이었다. 고향에 남고 싶었지만, 대구에는 고교 졸업 후 자신과 같은 국가대표급 인재를 받아줄 실업팀이 아예 없었다. 무엇보다도 훈련할 400m 정규 규격 빙상장조차 없다. 화성시청 입단 다음 해 장성우는 화성시청 소속으로 전국동계체전에 출전해 다수의 메달을 휩쓸었다.
이 같은 인재 유출은 장성우뿐일까. 성남시청, 고양시청, 서울시청, 화성시청 등 수도권 실업팀에는 대구 선수들이 포진하고 있다. 장성우를 키워낸 박유석 코치는 "대구의 세금과 땀으로 훌륭한 선수를 키워 놓고, 정작 꽃을 피울 시기에 다른 지자체에 상납하는 꼴이 됐다"면서 "실업팀이 없고 진학할 대학이 없고, 이제 빙상장마저 없으니까 선수들이 중학교 올라가면 짐쌀 준비를 한다"며 안타까워했다.
◆"제2 김소희 나오려면 실업팀 창단해야"
대구 빙상은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고 제2의 김소희, 진선유를 키워낼 수 있을까. 현직 쇼트트랙 코치와 대구빙상연맹에 해결책을 묻자, 유일한 대안은 실업팀 창단이라고 입을 모은다. 익명을 요구한 한 코치는 "선수 4~5명만 뽑아 실업팀 만들어주면 잘해낼 자신 있다. 대구 떠나는 애들도 대학 졸업하면 고향에 돌아오고 싶어하는데, 실업팀이 없어 오고 싶어도 못 오는 거다. 대구 빙상 정말 안타깝다"고 했다.
유제욱 대구빙상연맹 전무는 "과거 정화여고-계명대 라인처럼 초·중·고·대학으로 이어지는 엘리트 체육의 사다리를 다시 구축해야 한다"면서 "대구시청이나 공기업을 기반으로 한 빙상 실업팀을 만들어 대구 선수들이 고향의 이름을 달고 뛸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야 한다. 그게 가장 시급하다"고 주문했다.
이효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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