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책에 갇힌 인문학

  • 여송하 박물관 휴르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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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2-02 06:00  |  발행일 2025-12-01
여송하 박물관 휴르 관장

여송하 박물관 휴르 관장

박물관 문화 사업을 떠올릴 때면, 나는 언제나 '박물관 길 위의 인문학'을 먼저 생각한다. 시민과 문화 취약계층이 역사와 문화, 예술을 만나며 삶을 돌아볼 수 있도록 마련된 프로그램이었다. 박물관은 독립 예산으로 전시와 유물, 지역 역사로 고유한 프로그램을 꾸려왔다. 유물 앞에 선 시민들은 오래된 시간의 숨결 속에서 삶을 비추었고, 박물관은 조용히 길을 비추었다.


하지만 박물관은 '찾아오는 이들'만을 기다리지 않았다. 오기 어려운 문화 취약계층을 위해 대구 곳곳의 학교와 기관에서 전시 자료와 관련 인문학 수업을 진행했다. 공간의 문턱을 낮추고 시민에게 먼저 다가간 노력은 길 위의 인문학 정신과 맞닿아 있었다.


특히 잊을 수 없는 순간도 있었다. 어느 해, 접수 공지가 올라가자마자 전화가 쏟아져 3시간 만에 1천700명이 넘는 신청이 들어왔다. 문화생활에 목말라 있던 이들은 박물관을 통해 작은 위안과 숨 돌릴 틈을 찾았다. 프로그램들은 마른 땅에 내린 단비처럼, 지역사회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나는 인문학이 책장 속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피어난다고 믿는다. 인간과 장소, 기억과 역사를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과정 전체가 바로 인문학이다. 박물관은 그 무대가 된다. 전시실 유물은 글자가 아닌 형태와 온도로 말을 건넨다.


그런데 2024년부터 길 위의 인문학이 한국도서관협회로 통합되며 박물관 독자 프로그램은 사라졌다. 도서관 중심 행정은 책과 강의에 익숙하지만, 유물과 전시 공간을 기반으로 한 박물관식 인문학에는 맞지 않는다. 주제 도서를 끼워 넣고 이론 강의를 채우는 커리큘럼은 박물관 특유의 느리고 깊은 사유를 줄였다.


길 위의 인문학은 원래 각 기관 고유의 방식으로 시민에게 인문학적 경험을 제공했다. 하지만 지금은 도서관식 틀과 평가 기준이 모든 것을 지배한다.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탐방을 떠나는 것만이 '인문학'이 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내가 바라는 것은 단순하다. 박물관이 다시 박물관답게, 유물과 공간으로 시민에게 살아 있는 인문학을 전할 수 있는 자율성을 되찾는 일이다. 박물관식 인문학은 책상 위가 아니라, 오래된 유물과 마주한 순간에 숨 쉰다. 예전처럼 많은 시민과 학생들이 참여해, 유물과 공간 속에서 삶을 돌아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돌아오길 나는 그리워한다. 그때 박물관은 유물과 공간이 숨 쉬며 살아 있는 인문학의 장이 되고, 오래된 유물이 전하는 조용한 속삭임이 마음 깊숙이 스며들어 삶을 다시 바라보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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