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 그들의 독백 ③ ‘표찰이 무거웠던 소년’ 윤재옥…단칸방 소년이 중진 의원이 되기까지

  • 정재훈
  • |
  • 입력 2026-02-03 17:32  |  발행일 2026-02-03

안녕하세요. 국회의원 윤재옥입니다. 평소의 저라면 이런 자리가 무척이나 쑥스러웠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잘난 척하지 마라, 남에게 폐 끼치지 마라" 어릴 때부터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가르침이 제 몸에 새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정치인으로서 때로는 이런 부분이 핸디캡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넥타이를 풀고 이 자리에 앉은 이유는, 제 화려한 이력서의 행간에 숨겨진 진짜 '사람 윤재옥'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어서입니다.


국민의힘 윤재옥 의원이 한 살되던 돌 사진. 윤재옥 의원실 제공.

국민의힘 윤재옥 의원이 한 살되던 돌 사진. 윤재옥 의원실 제공.

◆ 대나무 숲을 지나 대구의 단칸방으로


제 기억의 시작에는 컴컴한 대나무 숲이 있습니다. 경남 합천 덕곡, 할아버지가 마을 청년들에게 한학을 가르치시던 큰집 사랑채로 가는 길이었죠. 네댓 살 무렵이었을까요. 어머님은 매일 새벽 저를 깨워 문안 인사를 보내셨습니다. 대나무가 우거진 어둠 속은 어린 마음에 무서웠지만,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듣던 천자문 소리가 제 인생을 바꿔놓았습니다. 항상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 듣던 소리에 익숙해지다 보니, 다섯 살에 천자문을 뗐다는 소문이 마을에 파다했다더군요. 당시 대구의 한 알루미늄 공장에 다니시던 아버지에게 주변 어른들은 "자네 아들은 꼭 도시로 데려가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결국 국민학교 1학년 1학기를 마칠 때 대구로 이사를 갔습니다. 당시 합천 덕곡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창녕 이방에서 시외버스를 탔던 날, 우리 가족의 이삿짐은 리어카 한 대가 전부였습니다. 당시 서구 내당동 터미널에 내리던 때를 아직 기억합니다. 분수처럼 물이 솟구치던 냉차 장사가 어찌나 신기했던지…. 10가구가 화장실 하나를 두고 전쟁을 치르던 단칸방 생활. 그게 제 대구 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 '표찰'을 단 어린이 회장의 무거운 걸음


내당국민학교는 학생이 6천명이나 되던 큰 학교였습니다. 북새통 속에서 저는 6학년 전교 어린이 회장이 됐습니다. 그것도 4·5·6학년의 직접 투표로요.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학교에 기부금 한 푼 낼 처지가 못 됐으니, 아마 학교는 제가 당선되는 걸 그리 반기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선생님의 추천과 제가 직접 원고를 쓰고 선거를 준비했던 '진심'이 3천 명 친구들의 마음을 움직였나 봅니다.


당시 학생회장은 옷에 커다란 '표찰'을 달고 다녔습니다. 비산동 집까지 한참을 걸어가는데, 그 표찰이 얼마나 무겁게 느껴졌던지. 길거리에서 소변이 급해도 그 표찰을 달고 차마 실례를 할 수가 없어 집까지 종종 걸음으로 뛰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남의 눈을 의식하고, 내 위치에 걸맞은 행동을 해야 한다는 그 강박적인 '절제'는 어쩌면 그때부터 제게 새겨진 본능이었을 겁니다.


대구 내당초등학교 졸업식에서 대표로 발언하고 있는 윤재옥 의원. 윤 의원은 6회 졸업생이다. 윤재옥 의원실 제공

대구 내당초등학교 졸업식에서 대표로 발언하고 있는 윤재옥 의원. 윤 의원은 6회 졸업생이다. 윤재옥 의원실 제공

시간을 잠깐 옮겨보면, 서울 경찰청 인사계장으로 근무할 때 낯선 번호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습니다. 전화를 건 이는 뜻밖에도 6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여학생이었습니다. 이제는 유명한 화가가 되었다는 그 친구는 신문에 난 제 이름을 보고 수소문 끝에 전화를 했다더군요.


당시 선생님이 자습을 시키고 잠시 자리를 비우시면, 저는 선생님 지시로 선생님 대신 교단에 서서 제가 읽은 동화책이나 위인전 이야기를 친구들에게 들려주곤 했습니다. 아이들은 선생님 수업보다 제 이야기가 더 재미있다며 눈을 반짝였죠. 그래서 그 친구는 "재옥이는 나중에 커서 어떤 사람이 될까?"가 평생 궁금했답니다.


정작 저는 잊고 살았던 그 사소한 기억이, 누군가에겐 30년 넘게 간직해온 소중한 추억이었다는 사실에 코끝이 찡해졌습니다. 제가 경찰이라는 험한 조직에서 '절제'와 '공심'을 잃지 않으려 애썼던 이유도, 어쩌면 저를 기억하는 그 친구들의 순수한 기대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경찰대학 시절 윤재옥 의원. 윤재옥 의원실 제공

경찰대학 시절 윤재옥 의원. 윤재옥 의원실 제공

◆ 20여년 만에 배달된 종이 한 장


제 삶에는 유독 저를 아껴주신 스승님들이 많았습니다. 수많은 인연 중에서도 6학년 담임이셨던 최병희 선생님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아릿해집니다. 만 36세에 경북 고령경찰서장으로 부임했을 때, 초등학교 담임이셨던 최병희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편지는 제 공직 생활의 이정표가 됐습니다. 그 안에는 20여년 전 졸업식 날, 제가 직접 쓰고 낭독했던 졸업식 답사 원고가 들어있었습니다. 선생님은 제자가 수석으로 입학했을 때도 축하엽서를 보내주셨기에, 첫 경찰서장 발령을 받았을 때까지 그 낡은 종이를 가슴에 품고 기다려주셨다는 것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 출간하신 회고록에도 제 이름을 남기셨고, 임종의 순간까지도 제 안부를 궁금해하셨다고 합니다. 상주인 아드님과 이야기를 하며 저는 다시 한번 깨달았습니다. 제가 걸어온 길이 단순히 한 개인의 성취가 아니라, 한 스승이 평생을 바쳐 길러낸 정성이자 기도의 결과였다는 것을 말입니다.


또한 중학교 시절 진로를 고민하던 저를 위해 아버지와 만남을 가지기도 했던 도청일 선생님은 지금도 제 인생의 멘토이십니다. 그분은 제가 국회의원이 된 지금도 가끔 제 사무실을 찾아오십니다. 제가 자리에 없을 때가 많지만, 선생님은 개의치 않으십니다. 그저 묵묵히 일하고 있는 저희 직원들에게 "우리 재옥이 잘 부탁한다"며 밥값을 주고 가십니다. 담긴 마음이 얼마나 무겁고 따뜻한지 알기에, 저는 정치를 하며 사심이 고개를 들 때마다 선생님들의 뒷모습을 생각합니다.


◆ 운명처럼 다가온 '경찰대학 1기 수석'


사실 경찰관이 되겠다는 거창한 꿈은 없었습니다. 그저 함께 공부하던 선배가 "새로 생기는 학교이고, 경찰도 이제 엘리트 간부를 키워내는 만큼 비전이 좋다"며 권했을 뿐이었죠. 원서조차 구하기 힘들었지만 아버지가 지인에게 부탁해 겨우 구해 시험을 쳤습니다. 결과는 120명 모집에 2만6천여명이나 응시한 시험에서 1등이었습니다.


수석이라는 타이틀은 영광이었지만, 동시에 굴레이기도 했습니다. 1기 수석이 다른 대학으로 가버리면 새로 문을 연 학교의 입장이 어찌 되겠나 싶은 마음에 다른 길은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남의 입장을 먼저 생각하고, 폐를 끼치지 않으려는 천성이 저를 경찰의 길로 떠밀은 것이죠. 합격 후에도 이같은 마음가짐이 결국 수석 졸업이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경찰 조직은 제게 잘 맞는 옷이었습니다. 바둑판의 몇 수 앞을 보듯, 지휘관으로서 현장에 가면 범죄 예방과 범인검거를 위해 어디를 어떻게 차단해야 할지, 누가 유능한 인재인지 어떻게 써야할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남들이 '꽃보직'을 찾을 때 처음부터 하드트레이닝을 받았던 경험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정보국에서 청와대에 보내는 보고서를 쓰는 업무를 맡았습니다. 오타 하나에 종이를 전부 다시 치던 '공타' 시절, 자존심을 짓밟는 상사의 질책에 화장실 벽을 발로 차며 울분을 삼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하드 트레이닝이 저를 '경찰대학 출신 1호 총경, 경무관, 치안감, 치안정감'으로 만들었습니다.


경기경찰청장 시절 윤재옥 의원. 윤재옥 의원실 제공

경기경찰청장 시절 윤재옥 의원. 윤재옥 의원실 제공

◆ 명예에 따른 댓가는 가혹, 그리고 '절제·균형·겸손'


세상은 저를 '전설' 혹은 '신화'라 불렀지만, 제게 경찰 생활은 명예로운 만큼이나 가혹한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경찰대학 1기 수석이라는 꼬리표는 늘 질시와 견제의 대상이 되기 쉬웠고, 작은 실수 하나도 돋보기 아래 놓인 것처럼 크게 부각될 것 같았습니다. 저는 늘 '몰래카메라'가 따라다닌다고 생각하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옷깃을 여미고, 말 한마디를 내뱉기 전에 세 번을 삼켰습니다. 그렇게 몸에 밴 습관이 자연스럽게 제 좌우명이 되었습니다. 바로 '절제' '균형' '겸손'입니다.


세 단어는 제가 척박한 공직의 길에서 길을 잃지 않게 해준 좌표와 같았습니다. 물론 쉽지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딸 아이가 "아빠를 보니 공직자와는 절대 결혼하지 않겠다"며 고개를 내저었을까요.


특히 경찰청 정보국에서 밤새 보고서를 치며 모진 질책을 견디던 시절이 기억이 납니다. 저는 매일 사표를 품에 안고 살았습니다. 그때 저를 붙잡아준 건 아내였습니다. 자존심이 꺾여 울분에 차 있을 때, 아내는 말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당신은 어디 가서 뭘 해도 잘할 수있는 사람이다. 정말 힘들면 지금 그만둬도 괜찮다"며 대범하게 멍석을 깔아주었죠. 그 한마디에 다시 힘을 냈습니다.


경찰청장의 문턱에서 제복을 벗었을 때, 아내가 가장 힘들어했습니다. 하지만 아내는 대범했습니다. 1년 넘게 야인으로 지내던 제게 로펌이나 공기업 제안이 쏟아질 때, 아내는 기준을 정해주었죠. "후배들이 보고 있다. 당신은 1호가 아니냐. 퇴직해도 직업 선택의 자유가 없다. 후배들에게 길을 터줄 수있는 공적인 일을 해야 한다"구요. 그 말에 다시 마음을 다잡고 고향 대구에서 정치를 시작했습니다.


신혼여행지에서 윤재옥 의원과 부인 박혜숙씨. 윤재옥 의원실 제공

신혼여행지에서 윤재옥 의원과 부인 박혜숙씨. 윤재옥 의원실 제공

◆ 대구와 나, 닮은꼴의 운명


지금도 동대구역에 내리면 가슴이 뜁니다. 대구의 공기, 그 특유의 냄새만 맡아도 좋습니다. 사람들은 대구가 보수적이고 답답하다고들 하지만, 제가 본 대구는 그저 남에게 손 벌리기 싫어하고 사람의 기본적인 도의를 중시하는 선비의 마음을 가진 도시입니다.


현재 대구가 겪는 어려움은 구조적이고 복합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안 되면 되게 한다"는 그 투박한 뚝심이 우리에겐 있습니다. 저 윤재옥도 그랬습니다. 단칸방 아이가 1등이 되고, 가혹한 시련을 견뎌내며 여기까지 온 것처럼, 우리 대구도 침체된 분위기를 걷어내고 다시 희망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도 스스로를 드러내기보다 묵묵히 꼬인 실타래를 풀어내는 정치를 하려고 합니다. 잘난 체하지 말고, 남에게 베풀며 살라던 할아버지의 가르침대로, 대구라는 이름의 그 뜨거운 심장 소리를 따라 뚜벅뚜벅 걷겠습니다.



기자 이미지

정재훈

서울정치팀장 정재훈입니다. 대통령실과 국회 여당을 출입하고 있습니다.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정치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