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기획] 그들의 독백 ① ‘복숭아 팔던 소년’ 주호영이 말하는 인생 이야기

  • 정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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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1-04 16:25  |  수정 2026-01-05 11:20  |  발행일 2026-01-05
어린 시골 소년의 복숭아 장사에서 시작된 삶
절 옆에서 자란 인연으로 불교계의 법률 고문 역할로
정직한 정치 다짐과 AI 시대에서도 농경 정신 지킴

오늘만큼은 복잡한 여의도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흙냄새 풀풀 나던 제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드릴게요. 사람들은 저를 6선 의원, 국회부의장, 국회에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이라고 불러요. 불교계 마당발이라고 부르기도 하고요. 하지만 넥타이를 풀고 거울 앞에 선 저는 '농경사회의 마지막 세대'로 AI 시대에 적응하는 사람이에요.


주호영 의원 초등학교 졸업사진. 주호영 의원실 제공

주호영 의원 초등학교 졸업사진. 주호영 의원실 제공

# 산에 불을 놓고 심은 복숭아


초등학교 때, 아버지가 농촌지도소에 이어 농업 선생님으로도 계셨는데 갑자기 신품종 복숭아나무를 보급하라는 '오더'가 내려왔데요. 우리 식구가 갑자기 화전민이 됐죠. 산에 불을 질러 화전을 일궜어요. 나무뿌리를 일일이 캐내며 밭을 만들었죠.


아버지는 농촌지도소에 이어 농업 선생님으로도 계셨는데, '양봉' '누에 치기' '협동조합' 같은 과목을 가르치셨어요. 제가 밤마다 아버지 옆에서 그 시험지 채점을 도왔거든요. 그래서인지 저는 지금도 농사 용어나 원리에 꽤 밝은 편이에요.


그 시절 학교가 파하면 저는 소를 먹이고 과수원 일도 도왔어요. 산에서 복숭아를 따서 지게에 지고 200~300m 논둑길을 걸어 내려와 다시 리어카에 싣고 시장으로 갔죠. 그런데 이 복숭아란 녀석이 참 야속해요. 한꺼번에 익으면 전부 통조림 공장에라도 넘길 텐데, 나무마다 2~3일 간격으로 찔끔찔끔, 차례대로 익는 거예요. 그러니 어쩌겠어요. 제가 매일 리어카를 끌고 시장에 나가 소매로 팔아야 했죠.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차를 마시는 주호영 의원. 주호영 의원실 제공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차를 마시는 주호영 의원. 주호영 의원실 제공

# "복숭아 장수가 판사돼서 왔다"


다행히 복숭아 하나는 기가 막혔어요. 품종이 좋았거든요. 물렁한 '물복'이 아니라 딱딱하면서도 향기가 진하고 맛이 좋았어요. 제가 리어카를 끌고 가면 시장 과일 장수들이 서로 가져가겠다며 쟁탈전을 벌일 정도였으니까요. 세월이 흘러 제가 판사가 되고 나서 옛 추억을 찾아 그 울진 시장을 다시 간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계시던 과일 아주머니들이 저를 알아보고 "아이고 세상에, 복숭아 장사하던 그 학생이 판사가 됐다"며 반겨주시던게 기억이 납니다.


사실 가끔은 너무 힘들어서 꾀를 부리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 가져간 걸 다 팔고 집에 왔는데, 할머니가 "남은 게 더 있으니 한 번 더 갔다 와라" 하시면 제가 막 화를 내기도 했거든요. 그때 복숭아 한 개에 제일 큰 것은 500원 정도 받았는데, 할머니께서 저를 달래려고 용돈을 쥐어주셨어요. 어린시절에 뭐가 제일 좋았겠어요? 그럴 때 마다 '아이스케키'를 사 먹었어요. 많이 먹을때 20개까지 먹었어요. 근데 왜 더 못 먹었는지 아세요? 너무 많이 먹어서 입술이 마비돼버린 거예요. 얼얼해진 입술을 풀기위해서 어쩔줄 모르던 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웃음이 납니다.


# 삶의 궤적과 같이한 불교


저를 보고 '불교통'이라고들 하시는데, 사실 처음부터 종교적 깨달음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시작은 형의 '중학교 입시' 때문이었죠. 당시 중학교 입학 시험이 경쟁률이 심할때 였는데, 그러다보니 늦게까지 공부하는 형을 위해 할머니와 함께 호롱불을 들고 3㎞ 거리를 마중하러 가기도 했어요. 그러다 결국 형과 함께 울진 읍내로 이사를 갔죠. 그런데 하필 집 바로 옆이 '동림사'라는 절이었어요. 담장 너머 들려오는 목탁 소리가 자장가 같았고, 절 마당은 자연스럽게 제 놀이터가 됐죠. 그때부터 제 삶엔 늘 부처님의 인연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것 같아요.


대학시절 주호영 의원. 주호영 의원실 제공

대학시절 주호영 의원. 주호영 의원실 제공

나중에 대구로 유학 와서 능인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거기가 조계종 종립학교였어요. 대구경북의 5대 본사라고 하죠. 그 큰 절들이 힘을 합쳐 만든 학교였거든요. 이후에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판사가 되니, 학교 이사로 계시던 큰스님들이 자연스럽게 저를 찾으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저는 불교계의 '법률 고문'이 됐습니다. 조계종에는 '중앙종회'라고, 국회처럼 종단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의결 기구가 있어요. 스님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는데, 법률적인 문제가 생기면 회의를 멈추고 저한테 전화를 하시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전국의 본사 주지 스님, 종회 의원 스님들을 알게됐죠.


인연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어요. 천태종 총무원장을 18년이나 지내신 분이 알고 보니 제 외가 7촌 아저씨뻘 되시더라고요. 또다른 집안 아재도 총무원장을 6년이나 하셨고요.


불교계는 '사형·사제' 관계가 끈끈하잖아요. 큰스님 한 분과 인연을 맺으면, 그분의 은사 스님, 상좌, 도반 스님들까지 줄줄이 인연이 닿아요. 절을 마당삼아 놀던 시골 소년이, 이제는 불교계를 외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 저는 이걸 우연이 아니라 거스를 수 없는 인연이라고 생각해요.


# 비행기에서 MB를 설득하던 그 간절함으로


대구에 첨단의료복합단지가 들어올 때, 사람들은 그냥 된 줄 알지만 사실 피 말리는 전쟁이었어요. 원래 원주랑 오송이 훨씬 유력했고 준비도 많이 했거든요. 노무현 정부 때 결정 났어야 했는데 1년 반이나 미뤄지다가 정권이 바뀌었죠.


기억에 남는 장면은 제가 이명박(MB) 대통령과 중앙아프리카 순방을 가는 비행기 안에 있었어요. 대통령 옆자리에 앉아서 정말 집요하게 보고하고 설득했죠. 다른 지역에서 반발이 심했고 나중엔 선거에 영향을 줄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었어요. 지금 고인이 되신 한 의원이 나중에 "첨복단지는 주호영 공이 제일 크다"고 말해준 것도 그런 과정을 알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SOC 사업들도 많이 기억나죠. 도시철도 3호선 때도 예비타당성 조사가 안 나와서 도저히 안 되는 거였는데, 5만 명의 서명을 받아서 장관을 설득했고요. 원내대표 때 대구경북(TK)통합신공항법도 민주당이 반대할 때, 광주공항 법안이랑 같이 패스트트랙 태워서 통과시켰잖아요. 큰 프로젝트는 그냥 되는 게 없더라고요.


2004년 총선에 출마한 당시 한나라당 주호영 후보. 영남일보DB

2004년 총선에 출마한 당시 한나라당 주호영 후보. 영남일보DB

# 민주당도 인정하는 '말값'의 무게


사람들이 가끔 물어요. "왜 민주당 의원들이 주호영한테만 유독 관대하냐"고요. 제가 뭐 술을 잘 사서 그럴까요, 아니면 마냥 사람이 좋아서 그럴까요? 천만에요.


제가 국회에서 교섭단체 대표연설을 무려 다섯 번이나 했어요. 이건 헌정사상 거의 없는 기록일 겁니다. 당 대표가 원외에 있거나 공석일 때마다 제가 짐을 짊어졌는데, 그때마다 제 철칙은 딱 하나였어요. "여당일 때 했던 말을 야당 됐다고 뒤집지 말자."


정치판을 보면 참 비겁할 때가 많아요. 야당일 땐 "검찰이 정치 개입하면 안 된다"고 목에 핏대를 세우던 사람이, 여당이 되고 나선 검찰 편을 들며 입을 싹 닦아요. 소위 '내로남불'이죠. 그게 너무 싫었어요. 사람이 상황 따라 말이 바뀌면, 그 순간 정치적 생명은 끝나는 거예요.


제가 문재인 정부 시절 원내대표를 하면서 청와대랑 민주당을 정말 아프게 비판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반박을 잘 못 했어요. 왜냐? 제가 억지를 부린 게 아니었으니까요. "너희가 야당일 때 주장했던 논리, 왜 지금은 안 지키냐"고 따졌거든요.


국회본회의장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주호영 국회부의장. 주호영 의원 페이스북캡처

국회본회의장에서 사회를 보고 있는 주호영 국회부의장. 주호영 의원 페이스북캡처

민주당의 강성 의원들조차 사석에서 저랑 소주 한잔하면 말해요. "주 대표는 그래도 뒤통수는 안 치잖아." 이 말이 제겐 훈장과 같아요. 정치가 아무리 진영 싸움이라지만, 결국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에요. "저 사람은 적이지만 말은 통한다" "적어도 약속한 건 지킨다"는 믿음이 있어야 협상도 되고 타협도 되는 겁니다.


# AI 시대 '마지막 농경시대 사람'의 다짐


세상은 이제 인공지능(AI)이 시를 쓰고, 챗GPT가 1초 만에 답을 내놓는 최첨단 시대로 변했어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스스로를 '농경사회의 마지막 세대'라고 생각해요. 농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거든요. 볍씨를 뿌리지 않고 거둘 수 없고, 땀을 흘리지 않고 열매 맺을 수 없어요. 아무리 기술이 발전하고 AI가 똑똑해져도, 이 '정직한 땀'의 가치는 AI가 흉내 낼 수 없는 영역이라고 생각해요.


정치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당장 눈앞의 인기를 쫓기보단, 화전민이 밭에 심은 복숭아나무처럼 묵묵히 뿌리를 내리는 마음이 필요해요. 너무 빨리 변해서 어지러운 이 세상에서, 저는 '농경 세대의 막내'로서 변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고 싶어요.


디지털의 속도에 지친 분들에게 아날로그의 진심을 전하는 정치, AI가 계산할 수 없는 '사람의 온기'를 담아내는 정치. 지게 지던 열다섯 살 소년의 그 정직한 마음으로, 21세기 대한민국을 위해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게 제가 여러분께 드리는 다짐이자 약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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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재훈

서울정치팀장 정재훈입니다. 대통령실과 국회 여당을 출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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