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본사 부장 장석원
'너'라는 한 글자는 짧지만, 사람 사이의 거리를 단번에 가르는 힘을 갖고 있다. 친한 사이에서는 자연스럽지만, 권위가 작동하는 자리에서는 결코 쉽게 쓸 수 없는 말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이 말이 얼마나 위험한 무기가 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 기록돼 있다. 세조 4년, 경회루에서 열린 잔치에서 집현전 학자 정인지는 술기운에 왕을 향해 "너(汝)"라고 했다. 그 시대의 군신 관계를 떠올리면 중대한 실수였다.
정인지는 단순한 신하가 아니었다. 그는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했고, '훈민정음 해례본'의 서문을 직접 지은 학자였다. 조선 초기 지성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왕에게 '너'라고 말한 것이다. 학식과 품위를 갖춘 인물의 입에서 나온 실수였기에 충격은 더 컸다. 신하들은 중죄라며 잔뜩 긴장했지만, 세조는 뜻밖에도 웃어 넘겼다. 엄격한 서열보다 사람을 먼저 본 것이다.
문제는 말 자체였던가, 아니면 그 말을 받아들이는 태도였던가. 이 오래된 일화는 지금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말의 잘못보다 태도의 무게가 관계의 높낮이를 결정한다는 사실이다.
이 질문은 최근 지방의회에서 벌어진 몇몇 장면들과도 겹쳐 보인다. 지난 19일 영천시 한 체육관에서 열린 행사에서, 한 의원은 행사 진행을 맡은 공무원에게 축사 기회를 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큰소리로 항의하며 욕설을 퍼부었다. 주민을 위한 행사였지만, 말의 온도는 단숨에 서열의 언어로 변했다.
지난 5월에는 구미시의회 한 의원이 행사 축사 순서에서 자신의 이름이 빠졌다는 이유만으로 공무원에게 욕설을 하고 뺨까지 때린 사건도 있었다. 말의 태도가 권력의 태도로 번질 때 어떤 폭력이 발생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요즘 지방의회를 보면 회의장에서의 말투 하나, 질의하는 자세 하나가 존중이 되기도 하고 갑질이 되기도 한다. "절차도 모르나", "어디 소속인가" 같은 문장은 규정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서열을 요구하는 언어다.
갑질은 큰소리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표정, 침묵, 무심한 손짓 같은 미세한 행동 속에서도 조용히 스며든다. 그 반대편에서는 을질이 자란다. 말하기를 주저하고, 눈치를 보고, 정당한 요구도 스스로 줄이는 태도다. 둘은 서로를 키우며 공동체의 품격을 조금씩 갉아먹는다.
우리 속담 '일당백(一當百)'은 혼자서 백 명을 감당하는 능력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 자리에는 그만큼의 책임이 따른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방의회처럼 주민의 삶을 대신 말하고 대신 결정하는 위치라면 더욱 그렇다. 적어도 일당백의 자리에 있는 사람부터 말 한마디를 조심해야 한다.
정인지는 실수를 했지만, 세조는 벽을 세우지 않았다. 그 장면이 관용의 일화로 남은 이유는 권력이 언어를 폭압이 아닌 품격으로 다스렸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더 위험한 것은 실수 그 자체가 아니라, 실수를 갑질로 만들고 을질을 강요하는 태도다. 직위가 높을수록 말의 높낮이를 낮추고, 책임이 클수록 언어의 무게를 가볍게 해야 한다.
지방의회가 먼저 그 변화를 보여줄 때, 공동체는 한층 더 성숙해질 것이다. 말의 온도는 사람의 마음을 비추고, 태도의 높이는 공동체의 수준을 드러낸다. 일당백의 자리에 선 사람들이 먼저 이 말을 기억해 준다면 어떨까.
경북본사 부장 장석원
장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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