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전통의 문턱

  • 여송하 박물관 휴르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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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2-09 06:00  |  발행일 2025-12-08
여송하 박물관 휴르 관장

여송하 박물관 휴르 관장

전통의 온도는 책 속이 아니라, 그 현장에 들어설 때 비로소 몸으로 느껴진다.


지역아동센터에서 진행한 '찾아가는 박물관' 도자 수업이 마지막 회차를 앞둔 이번 주는 특히 분주했다. 아이들의 작품을 온전히 완성하기 위해 손길을 더해야 할 부분이 있어, 영천의 국가 무형유산 제55호 보유자 엄태조 선생님의 목공방을 찾았다. 박물관 개관 이후 매년 특별 전시로 인연을 이어온 곳이라 더욱 반가웠다.


목공방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다가온 것은 고요한 질서였다. 도구 하나, 톱밥 한 점까지 흐트러짐 없이 놓여 있었고, 그 정갈함 속에서 세월을 견딘 장인의 손길이 은은히 빛났다. 말없이도 전해지는 한국적 미감과 장인정신이 공기처럼 스며 있었다.


이곳에서는 전통을 잇기 위한 전수 교육도 이루어진다. 그러나 젊은 전수자가 줄어든다는 선생님의 말씀에는 깊은 걱정이 담겨 있었다. 화려한 문화의 시대이지만, 정작 그 뿌리를 지켜내는 사람들은 갈수록 드물다. 전통 목공예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오래된 삶과 미감을 품은 세계라는 점을 떠올리면 더욱 안타깝다.


목공방에서 마주한 풍경은 박물관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했다. 전통이 사라지는 이유는 기술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그것을 만날 기회가 점점 줄어들기 때문이다. 박물관은 전시를 보여주는 공간을 넘어, 시민이 전통의 숨결을 직접 느끼고 배울 수 있도록 길을 열어야 한다. 특히 아이들에게 오래된 기술과 장인의 철학을 경험하게 하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이들은 손끝으로 피어나는 작은 감각으로 세상을 배운다. 책이 채워줄 수 없는, 몸으로 익히는 배움이다.


지역아동센터에서 진행한 도자기 수업도 그런 맥락에 있다. 아이들이 만든 작품이 누군가의 미래를 바꾸지는 않겠지만, 새로운 세계를 두드리는 작은 시작이 될 수는 있다. 전통은 이렇게 사소한 경험, 한 번의 만남에서 이어지기도 한다.


목공방을 나서는 길, 나는 조용히 생각했다. 전통은 스스로 남아 있지 않는다. 누군가 손을 내밀고, 누군가 그 손을 잡을 때 비로소 다음 세대로 건너간다. 박물관이 해야 할 일은 그 건너가는 길을 마련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처음 만나는 세계를, 장인에게는 세대와 사회를 잇는 무대를 내어주는 일이다.


그래서 나는 박물관이 평생교육기관으로서 더욱 단단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오래된 기술과 삶의 지혜가 아이들의 짧은 순간 속에 깃들 때, 그 조용한 순간들이 결국 지역의 문화와 미래를 지탱하는 힘이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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