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회 상화시인상] 안희연 시인 수상소감 “빼앗긴 들 걷듯 당근밭 걸으며 배워나가…머리 아닌 두 발로 시(詩) 쓸 것”

  • 안희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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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2-10 06:00  |  수정 2025-12-11 07:38  |  발행일 2025-12-11
안희연 시인

안희연 시인

수상 소식을 전해 듣던 순간, 수화기를 쥔 손이 파르르 떨렸습니다. 철로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미세한 진동이 일었어요. 무엇이 지나간 걸까요. 언제나 삶은 예상 못한 패를 꺼내 저를 놀라게 합니다. 또 오만하게 세상을 다 안다고 착각했구나, 아직 멀었구나, 고개를 숙입니다.


'당근밭 걷기'에 수록된 시를 쓰는 동안 이 세계의 참혹함에 대해 자주 생각했습니다. 소매 끝에 난 보풀 하나 떼어낼 힘없는 사람들이 그럼에도 이 세계와 싸워야 한다면 무엇으로 응전할 수 있을까. 이 땅을 떠나는 사람들이 늘어날수록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상화 시인도 그랬을까요. 그래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고,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다며 아프게 고백했던 것일까요. 상화의 '들'과 저의 '당근밭'을 포개어봅니다. 그가 빼앗긴 들을 그럼에도 걷는 사람이었듯 저 역시도 당근밭이라는 불가해한 세계를 분주히 걸으며 배워나갑니다. 시는 머리가 아니라 두 발로 걸으며 쓰는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면서요.


대체 무엇을 위해서일까요? 실은 매일 낙담합니다. 보풀은 너무나 작고, 세계와의 접촉면에서 일어난 불화의 조짐이자 잉여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나는 보풀만도 못한 인간이야." 하루의 끝에서 작아질 때마다, "네 소매 끝에 귀여운 보풀이 생겼네." 알아봐 주는 한 사람을 상상해요. 그 한 사람이면 인간은 살잖아요. 그리고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제 시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됩니다. 인간이 주지 못하는 위로를 문장이 줄 수 있기를, 그렇게라도 또 하루를 살아가기를, 하고요.


상화의 문장을 다시 읽어봅니다.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다는 염려 안에는, 설령 들을 빼앗기더라도 봄조차 빼앗긴 것은 아니라는 의식의 불씨가 숨어 있습니다. 그러니 상화의 이름으로 주어진 이 상에 힘입어 들불처럼 사랑을 일으킬 결심을 합니다. 방도도 정도도 없는 시 쓰기에 지칠 때마다 자세를 고쳐 앉고, 고통의 심부에 정확하게 가닿기 위해 찰흙을 매만질 결심입니다. 그 찰흙 더미에서 어떤 모양의 문장이 태어나든, 그 안엔 손의 악력과 박동이 반드시 스며 있을 거라 믿으면서요.


올해는 아빠가 돌아가신 지 삼십 주기가 되는 해입니다. 살면서 제게 주어지는 모든 행운은 모두 아빠가 주시는 거라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린 날 아빠를 묻으러 가던 산길은 질척하고 추웠습니다. 제 문장이 태어나는 찰흙 더미 속에는 그날의 흙도 일부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저의 시는 아빠의 상여와 함께 출발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아빠, 머리를 쓰다듬어주셔서 감사해요. 심사위원 선생님들, 제 시와 눈 맞춰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오래오래 쓰겠습니다. 이 다사로운 빛을 다시 문장으로 나눌게요.


안희연 시인=1986년 경기 성남에서 태어나 2012년 창비신인시인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 '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당근밭 걷기' 산문집 '단어의 집'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줍는 순간' 등을 펴냈다. 신동엽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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