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병윤 국립경국대 부총장
또 한해가 갔다. 세상은 시시각각 변했다. 무안공항 참사, 비상계엄과 탄핵 정국, 대통령 선거, 그리고 우리 지역을 덮친 대형 산불까지. 사건과 사고는 숨 돌릴 틈 없이 이어졌고, 우리는 그 격랑 속에서 또 한 해를 건너왔다. 문득 묻게 된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스쳐 지나간 삶의 한 장면이었을까. 달라진 것은 무엇일까.
필자 역시 '시시각각'이라는 제목 아래 한 해를 채웠다. 균형발전과 자치분권, 약팽소선의 정치, 신도시와 지역의 현안, 주민이 행복한 풀뿌리 민주주의를 화두로 삼아 글을 써 왔다. 이 글에서 과연 하나의 핵심은 무엇이었는지 되묻게 된다.
답은 낯설지 않다. 대학원 시절 공부하던 "한국의 지방선거에서 지방은 없다"는 문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방선거는 이름과 달리 지역의 미래를 놓고 경쟁하는 장이 되지 못한다. 쟁점은 중앙정치의 연장선에서 형성되고, 후보들은 지역의 현안보다 정당의 구도와 공천에 더 민감하다. 주민의 삶과 직결된 교육, 돌봄, 청년 문제는 선거 과정에서 쉽게 밀려난다. 그 결과 지방자치는 제도만 남고, 내용은 점점 비어 간다.
무안공항 참사가 어느새 '제주항공 사태'로 불리며 본질이 흐려지고, 대선 국면에서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이내 사라진 분권형 개헌 논의는 이러한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지역의 문제는 전국적 프레임 속에서 이름을 바꾸거나 희미해지고, 선거가 끝나면 다시 주변으로 밀려난다. 지방의 삶을 바꾸기 위한 정치와 제도는 늘 뒷순위에 머문다.
또 하나의 질문은 인구 감소와 저성장이 일상화된 '축소 사회'에서 모든 지역이 같은 방식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였다. 경북 북부와 예천처럼 산과 강, 농촌과 소도시로 구성된 지역에서 인구를 채우기 위한 유일한 해법이 공장과 산업단지 유치일까. 그렇게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그 실현 가능성은 과연 얼마나 될까. 이제는 변화된 생존 환경에서 대도시를 흉내 내는 전략을 넘어설 필요가 있지 않을까. 넓은 농촌 공간과 풍부한 자연환경, 공동체적 삶의 기억, 그리고 교육·문화·치유·돌봄으로 확장될 수 있는 잠재력을 제대로 살리는 길을 찾아야 한다. 지역의 지리와 환경에 맞는 발전 전략이란, 없는 것을 억지로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니라 이미 가진 것을 지혜롭게 엮는 일이다. 성장의 속도는 느릴지라도, 삶의 질과 공동체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길이다.
한 해 동안의 글쓰기는 결국 하나의 화두로 수렴된다. 자치와 균형발전의 핵심은 '얼마나 성장했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는가'다. 그리고 누가, 어떤 방식으로 그 변화를 이끌 것인가다. 그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 바로 풀뿌리 민주주의다. 주민이 직접 지역의 문제를 말하고, 토론하고, 결정하는 과정 없이는 지방선거도, 지방자치도 제자리를 찾기 어렵다. 거창한 국가 전략보다 지역의 일상을 바꾸는 지역의 정치와 행정이 더욱 절실한 이유다.
다행히 내년은 지방의 새판을 짜는 지방선거가 있는 해다. 기회이다. 지방선거는 단순히 사람을 뽑는 절차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지역의 방향을 다시 정하는 계기여야 한다. 지역의 삶을 기준으로 쟁점을 만들고, 형식이 아니라 내용으로 지방자치를 채우고, 지역 정치가 주민의 담론장이 되는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역의 삶을 향한 시선과 책임이다. 그 길에서 필자 역시 책임을 피하지 않겠다. 한해의 반성 위에 희망을 얹어, 내년 지방선거가 지역을 바꾸는 계기가 되도록, 묵묵히 그러나 온 힘으로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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