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빈집에 불을 켜는 일, 문화의 힘으로

  • 정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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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5-12-23 15:52  |  발행일 2025-12-23
정훈교 <문화콘텐츠그룹 시인보호구역 상임대표>

정훈교 <문화콘텐츠그룹 시인보호구역 상임대표>

골반을 드러낸 채로 저녁이 온다/하얀 눈밭을 지나 산 하나를 지우며 당신이 온다//며칠 내내 입으로만 전해지던 소문이/마침내 발 앞에 내려앉는다//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당신이/어제 문을 닫았다는,(졸시 '당신이라는 문장을 읽다,' 중에서)


가을이 짙다. 곧 겨울이 오겠지. 골목이 어둡다. 그 골목에는 문이 닫힌 집들이 있다. 현관 앞엔 바람이 쌓이고, 초인종은 녹슬고, 유리창 너머엔 오래된 커튼이 먼지와 함께 낡아간다. 그곳은 단순히 사람이 떠난 빈 공간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간이 머물다 간 자리, 또 한 지역의 문화가 꺼져가는 깊은 어둠 같은 곳이다. 빈집은 좁게는 한 개인의 생애 기록이고, 넓게는 그 마을이 지닌 시간의 축적이다.


한 채의 빈집이 늘어난다는 건 그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뜻이며, 그 지역이 품고 있던 문화가 사라진다는 의미다. 그 집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남지 않았다. 그곳은 단순히 사람이 떠난 자리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시간이, 가족의 역사가, 한 세대의 문화와 정서가 고스란히 쌓여 있는 자리였다. 래서 빈집은 '공간'이 아니라 '기억의 밀도'다. 집은 늘 사람과 함께 늙어야 하는데, 이제는 사람이 사라지고 집만 늙는다. 예전의 집들은 대부분 가족 단위의 공동체였다. 마을과 골목, 정과 나눔이 오갔던 생활의 터전이었다. 그곳에는 서로를 돌보는 협업의 정신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빈집이 늘어난다는 것은, 공동체의 온기가 빠져나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회적 신호다. 빈집은 증가는 곧 인구 소멸의 위기를 나타낸다. 사람이 사라진 마을은 골목의 빛도 함께 사라진다. 때로 빈집을 리모델링해 숙소나 카페, 주차장으로 바꾼다. 이런 시도는 단기적 편익이나 수익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그런 곳에는 문화가 태어나고 머물기는 어렵다. 초기엔 관광객의 호기심으로 붐비지만, 시간이 지나면 수익성이 떨어지고 결국 문을 닫는다. 이후 공간에는 지역의 정신도, 사람의 기억도 남지 않는다.


반대로 그 빈집에 문화가 깃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예술 전시, 공연, 글쓰기와 체험, 마을 사람과 여행객의 교류가 이뤄질 때 그 집은 다시 숨을 쉰다. 사람이 모이고, 마음이 쌓이며, 기억이 돌아온다. 수익보다 관계가 쌓이는 공간, 그 자체가 새로운 지역문화의 탄생이다. 문화는 물리적 공간을 살리는 힘이자, 지역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매개다. 빈집이 문화의 매개가 되면 그곳은 지역의 예술가와 역사, 관광이 함께 살아 숨 쉬는 하나의 로컬브랜드로 성장할 수 있다. 한 채의 빈집이 브랜드가 되고, 그 브랜드가 지역의 신뢰가 된다. 운영의 주체 또한 중요하다. 그 중심엔 반드시 2030 청년세대가 있어야 한다. 청년은 새로운 언어와 감각으로 세상을 다시 쓰는 존재다. 그들이 만들어가는 문화는 지역과 세대의 벽을 허문다. 청년이 있는 곳에 청년이 찾아오고, 그들이 머물 때 지역은 젊음을 되찾는다. 하지만 지역의 어르신과 생활인, 오랜 기억이 함께 호흡해야 문화는 지속된다. 세대가 공존할 때 그 공간은 단순한 '카페'가 아니라 사람과 이야기가 이어지는 '문화의 집'이 된다.


빈집은 이제 머무는 장소가 아니라, 움직이는 문화의 무대가 되어야 한다. 체험 기반의 문화스테이, 런케이션, 예술레지던시, 청년 문화교류 프로그램처럼 사람과 시간이 교차하는 문화기획이 필요하다. 그 속에서 예술과 일상, 관광과 생활이 자연스럽게 섞인다. 문화는 늘 경제보다 느리지만, 그 느림 속에서 지속가능성이 자란다. 백범 김구 선생은 일찍이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라고 피력하신 바 있다. 빈집은 그 느림을 품은 공간이다. 눈에 보이는 효율이 아니라, 시간이 쌓여 신뢰가 되는 공간. 그 신뢰가 결국 마을을, 그리고 사람을 다시 불러온다. 바람이 스치는 골목, 닫힌 문 하나에도 이야기가 있다.


그 빈집에 불을 켜는 일은 자본이 아닌, 우리의 온기로 가득한 '문화의 힘'으로만 가능하다. "당신이라는 문장을 읽다" 이 말처럼 우리는 한 집, 한 골목, 한 사람의 이야기를 다시 읽어야 한다. 그 속에서 다시 시작되는 문장, 그것이 바로 지역문화의 재생이다.


정훈교 <문화콘텐츠그룹 시인보호구역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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