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정 대구대 문화예술학부 교수
지난 2025년 12월 28일, 영국 가디언의 라파엘 라시드 특파원은 'Almost collapsed: behind the Korean film crisis and why K-pop isn't immune'라는 도발적인 제목으로 한국 콘텐츠 산업의 위기를 진단했다. 2024년 콘텐츠 수출액이 151억8천만 달러로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음에도, 국내 영화 관객 수는 2019년 대비 45% 급감했다는 통계적 수치는 산업의 기저가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인재 파이프라인이 안정적인 스트리밍 플랫폼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은 영화계의 위기가 곧 드라마 시장의 과부하와 창의성 고갈로 이어질 수 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불확실성의 시대에 작년 12월 5일 공개된 넷플릭스 시리즈 '자백의 대가'는 한국 드라마가 도달한 윤리적 깊이를 증명하는 '성취'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우리 산업이 직면한 위기 징후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남편 살해 용의자로 몰린 미술 교사 안윤수(전도연)와 '마녀'라 불리는 의문의 인물 모은(김고은), 비밀을 간직한 두 여자 사이의 심리전을 그린 미스터리 스릴러다. '사랑의 불시착' 등을 연출한 이정효 감독이 메가폰을 잡아 공개 전부터 큰 기대를 모았다.
서사는 평범한 미술 교사 안윤수가 남편 살해 혐의로 구속되면서 시작된다. 무죄를 입증할 길이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인 윤수에게 모은은 파격적인 제안을 건넨다. 자신이 남편을 죽였다고 허위 자백을 해주는 대신, 출소한 윤수가 자신의 복수를 대행해달라는 위험한 '살인 거래'다. 이 드라마는 이 거래를 축으로 진실과 거짓의 경계, 그리고 구원을 위해 인간이 어디까지 타락할 수 있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결국 남편을 죽인 진범이 밝혀지고, 윤수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모은은 스스로를 희생하며 비극적 결말을 맞이한다. 윤수가 그 과정에서 짊어진 '자백의 대가'는 법적 판결로도 상쇄되지 않는 도덕적 부채로 남는다. 작품은 통쾌한 복수나 명쾌한 정의의 회복 대신, 타인의 죄 위에 자신의 무고를 세울 때 감당해야 할 윤리적 비용을 끝까지 회피하지 않는다. 이러한 집요함은 전도연과 김고은의 밀도 높은 연기와 결합해, 한국 드라마가 여전히 심리극의 정점에 도달할 수 있음을 증명한다.
자백의 대가의 가장 큰 성취는 성공이 검증된 웹툰이나 소설 IP(지식재산권)에 의존하지 않은 '순수 시나리오 전용 작품'이라는 점이다. 이는 가디언이 지적한 '안전한 기획 위주의 시장' 속에서도 창작자의 상상력이 여전히 글로벌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이 작품은 공개 직후 220만 시청수를 기록하며 비영어 시리즈 부문 세계 2위에 올랐고, 9개국에서 TOP10에 진입했다. 한국적 정서에 기반한 윤리 서사가 보편적 공감을 획득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입증한 셈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작품은 가디언 지가 우려한 '플랫폼 중심의 변형'을 상징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과거라면 극장용 영화로 기획되었을 묵직한 서사들이 이제는 넷플릭스 오리지널이라는 스트리밍 플랫폼을 통해 소비되고 있다. 플랫폼 중심 제작은 창작자에게 대규모 자본과 창작의 자유라는 기회를 제공하지만, 한편으로는 콘텐츠를 플랫폼의 알고리즘에 최적화된 상품으로 전락시킬 위험도 내포한다. 가디언은 한국 콘텐츠가 글로벌 현상을 만들어낸 '문화적 진정성'을 훼손할 수 있다고 경고하며, 플랫폼으로의 인재 쏠림 현상이 산업의 근간을 흔들 수 있음을 꼬집었다.
이러한 위기론 속에서 2026년 이재명 대통령이 발표한 신년사는 희망적인 이정표를 제시한다. 이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대도약'을 선언하며 9조 6천억원까지 대폭 증액한 문화 예산을 토대로, K-컬처를 '미래 성장축'으로 삼겠다고 하였다. 이는 문화 콘텐츠를 단순한 상품 수출을 넘어 국가적 필수 성장 전략으로 격상시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제 우리는 이 '약속의 대가'를 지켜볼 것이다. 거대 자본 투입이 창작자의 자율성을 보장하고 실험적인 시나리오가 지속될 수 있는 생태계 복원으로 이어진다면, 한국 콘텐츠는 붕괴의 위기를 넘어 진정한 대도약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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