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달성군 구지면 일원에 14만5천㎡ 규모로 조성된 국가물산업클러스터 전경. 물 관련 핵심 인프라를 모두 갖춰 물산업 발전을 위한 궁극 인프라로 평가받는다. <영남일보 DB>
'물(水)'에 무너진 대구가 '물'로 일어서고 있다. 35년 전 낙동강 페놀 유출 사태로 씻을 수 없는 피해를 입은 대구에서 물산업 혁명이 태동하고 있다. 수십년간 '깨끗한 물'에 목마른 대구시민의 열망과 의지가 만들어낸 기적이라는 평가다.
17일 영남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대구 국가물산업클러스터 입주기업들은 2023년 매출 1조 4천385억 원을 기록하며 가동 5년 만에 누적 매출 5조 원을 달성했다. 전국 물 시장의 연평균 성장률(1.8%)을 크게 웃도는 32.7%의 가파른 성장세다.
2019년 달성군 구지면 일원(14만5천㎡)에 2천409억원(전액 국비)을 들여 조성한 국가물산업클러스터는 대한민국 물산업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릴 핵심 인프라로 꼽힌다. R&D(연구개발), 실증화, 사업화, 해외진출까지 전 과정을 구현한 원스톱 기업지원 복합단지다. 현재 물 분야 선도기업 150여개사가 입주해 있다. 집적한 실증화 시설 및 연구 인프라 등 하드웨어 수준은 세계 최고라는 데 이견이 없다.
클러스터 가동 이후 대구는 국내 물산업 수출의 핵심 전진기지로 자리매김했다. 2019년 206억원이던 입주 기업 수출액은 이듬해 503억원, 2021년 622억원, 2022년 793억원을 기록한 데 이어 2023년에는 1천억원을 돌파(1천66억원)했다. 수출기업 비중이 1.5%에 불과할 만큼 국내 물산업이 내수·영세 위주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같은 실적은 대구 물기업들의 경쟁력과 수준을 가늠케 한다.
대구 물산업 성장세는 전국 물시장 추이와 비교하면 더 두드러진다. 2019년 총매출 46조2천17억원이던 전국 물산업 시장은 2023년 50조9천970억원으로 연평균 1.8% 성장에 그쳤다. 수출액 역시 2019년 1조8천18억원에서 2023년 2조680억원으로 연간 2% 성장률을 기록했다. 같은 기간 클러스터 입주기업의 연평균 매출과 수출은 각각 32.7%, 56.7% 성장해 국내 물시장에 새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스톡홀롬·싱가포르와 함께 세계 3대 물포럼으로 불리는 '대한민국 국제물주간' 호스트가 대구라는 점도 의미가 크다. 지난해 국제물주간에는 60개국 1만2천여명이 참가해 물산업 선도도시 대구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서성수 국가물산업클러스터 입주기업협의회 회장은 "물은 AI나 로봇처럼 단기간에 비약적으로 크진 않지만 인류가 존재하는 한 지속 우상향하는 산업"이라며 "물산업이야말로 대구가 국내 1등을 할 수 있는 분야다. 대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물산업 진흥에 역량을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페놀 유출과 대구의 '잃어버린 30년'
대구시민에게 '물'은 단순 생활 인프라를 넘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지난 30여년간 물은 '갈등'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1991년 낙동강 페놀 유출 사태는 '국내 제3의 도시'였던 대구의 운명을 바꾼 일대 사건으로 평가받는다. 사건은 구미 두산전자 공장에서 페놀 원액이 대구의 식수원인 낙동강으로 유출되면서 시작됐다. 1991년 3월14일 페놀 원액 약 30t이 유출됐고, 4월에도 약 1.3t이 추가로 흘러들어 지역의 식수 공급이 중단되는 사태로 번졌다. 페놀 유출 사건은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안전한 식수원'에 대한 불안과 갈증으로 이어졌다. 또, 낙동강과 연접한 대구·경북·부산·경남권 전반의 물에 대한 불안감을 야기하며 지역 갈등의 불씨를 남겼다. 이후 수질 개선과 상수원 보호는 영남권 정치권의 주요 화두가 됐다.
이 사건으로 대구의 내상은 깊었다. 도시의 확장과 산업발전을 논의할 때마다 '물'이 발목을 잡았다. 1995년 대구의 미래 성장동력을 담고자 추진했던 위천국가산업단지 무산이 대표적 사례다. 페놀 유출 사건 불과 4년 후여서 낙동강 인근 산단 조성은 하류지역인 부산·경남권의 강한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산단 조성은 무산됐다. 이후 2016년 국가산업단지(달성군 구지면)가 준공될 때까지 대구는 산업용지 부족으로 기업 유치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페놀 유출 사건이 굴린 스노볼(눈덩이)이 작금의 '대기업 하나 없는 도시', '33년째 1인당 지역내총생산(GRDP) 꼴찌 도시'로 이어졌다는 게 경제계 공통된 시각이다. 30여t의 페놀이 우리나라에서 세 손가락에 꼽히던 대도시의 30년 미래를 끌어내린 셈이다.
대구정책연구원 윤상현 경제산업연구실장은 "위천산단 조성이 무산되면서 대구는 산업 체질 개선 시기를 놓쳤다. 제조 기반 도시가 페놀 유출 사건으로 구조 전환의 파도를 제때 타지 못한 건 대구의 입장에서는 큰 불운"이라고 자조 섞인 말을 쏟아냈다.
고도정수처리시스템. <그래픽=생성형AI>
◆ 맑은 물 갈증과 국가물산업클러스터
안전한 식수원에 대한 대구시민의 불안과 갈증은 자연스레 물산업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물에 크게 데인 대구시도 안전을 위해 안전한 수돗물 보급에 역량을 쏟았다. 실제로 페놀 사건 이후 대구의 상·하수도 인프라는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현재 대구 수돗물 보급률은 99%에 육박하며, 세계 어느 국가·도시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뛰어난 인프라를 갖췄다는 평가다. 대구에 씻을 수 없는 아픔을 안긴 낙동강 페놀 유출 사건이 아이러니하게도 물산업 부흥을 위한 토양을 갖추는 데는 일정 부분 공헌한 셈이다.
2013년 물산업 분야 궁극 인프라로 불리는 국가물산업클러스터 유치도 같은 맥락이다. 안전한 수돗물을 공급하려면 정수 기술이 필요하다. 사용한 하수가 강을 오염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하수처리 기술이 발전해야 한다. 이런 기술을 구현하려면 처리장치나 측정기 등 요소 기술도 함께 필요하다. 이 같은 시설들을 모두 집적한 종합 인프라가 국가물산업클러스터인데, 당시 맑은 물에 대한 시민의 열망과 관심이 최고조에 있던 대구로 올 수밖에 없는 흐름이었다는 게 업계 설명이다.
국가물산업클러스터입주기업협의회 이창 사무국장은 "간혹 다른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국가물산업클러스터 대구 입지에 대해 의아해한다"면서 "페놀 유출 사건 이후 지역사회가 물에 투자한 노력이나 비용을 보면 전국 압도적인 1위일 것이다. 국가물산업클러스터 유치는 페놀 유출 사태와 그 이후 대구시민의 노력에 대한 국가 차원의 '보상' 성격도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 반도체 2배 시장인데 '관심 밖'…왜?
2022년 기준 세계 물시장 규모는 1천280조원 규모로 평가된다. 이는 세계 전력시장 규모와 비슷하고, '산업의 쌀'로 불리는 반도체 시장의 2배에 달하는 초거대 시장이다. 미국과 중국, 일본이 전체 물 시장의 52%를 차지하는 가운데, 대구를 필두로 한 우리나라도 세계 10위권 진입을 목표로 달리고 있다.
무엇보다 글로벌 물 시장은 반도체와 인공지능(AI) 산업 성장과 더불어 '슈퍼 사이클'에 진입한다는 점에서 대구시의 과제가 뚜렷하다. 세계적 물 산업 조사기관 GWI(Global Water Intelligence)에 따르면 2022년 1천280조 원 규모인 세계 물 시장은 2028년까지 3.9%씩 성장할 것으로 예측됐다. 특히 AI 데이터센터 냉방과 반도체 미세공정 세척을 위한 '초순수' 수요 급증도 간과해서는 안 될 대목이다.
문제는 첨단 산업 연계형 수처리 기술 확보가 시급한 가운데 지방정부의 물산업 지원사격은 빈약해 한계성이 드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민선 8기부터 대구시가 ABB(인공지능·빅데이터·블록체인)와 미래모빌리티 등 이른바 5대 신산업 육성에 집중하면서 물산업은 대구시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났다.
예산으로도 흐름은 뚜렷하다. 민선 8기 첫해인 2022년 74억원이었 물산업 예산은 이듬해 61억원, 2024년 41억원, 지난해는 34억원으로 3년 만에 반토막 났다. 지원 부서도 '과'에서 '팀'으로 격하됐다. 물을 비롯한 친환경산업군에 대한 지원 배제 기조가 노골적으로 이뤄진 게 사실이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지방의회에서도 제기됐다. 지난해 11월 박종필 대구시의원은 서면 시정질문을 통해 "물산업 예산이 2022년부터 2024년까지 물산업 육성 예산이 연평균 23%, 총 54% 감액된 것은 '물산업 허브도시'라는 목표와 상풍되는 것"이라며 "향후 예산확보를 포함한 종합적인 개선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그는 "물산업 재도약의 핵심은 입주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에 있다"며 "장기 재직 유도, 우수 인력 유출 방지, 교통 및 주거·생활 인프라 확충 등 실질적인 지원책이 마련될 수 있도록 시의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하다"고 촉구했다.
다만, 작년 하반기부터 물산업은 다시 대구 주요 산업군에 포함되는 분위기다. 김정기 대구시장 권한대행은 취임 직후 국가물산업클러스터를 찾아 현장 관계자들의 애로사항을 청취했다. 올해 초 신년 업무계획 보고회에서도 물산업 진흥이 주요 안건으로 다뤄졌다. 올해 대구 경제 정책 주요 화두 중 하나가 ODA(공적개발원조) 확대인 만큼, ODA의 핵심인 물산업 관련 지역기업들의 수출 전망도 밝다는 분석이다.
[풀어야 할 과제는?]
"수도권에 몰린 물산업 사업체 대구 유치해야…건립 계획 중인 초순수 플랫폼 센터도"
대구 물산업 성장세가 무섭지만, 갈 길은 멀다. 2024년 기준 전국 물산업 사업체 수는 총 1만8천470개소로, 이중 절반에 가까운 8천997개소가 수도권에 집중돼 있다. 대구와 경북, 부산·울산·경남까지 합친 경상권에 절반 수준인 4천67개소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매출도 절반 수준(수도권 24조4천억여원, 경상권 12조4천억여원)에 그친다. 국가 물산업 핵심 인프라인 국가물산업클러스터에 더 힘을 실으려면 수도권에 있는 주요 물기업을 대구로 데려와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세계적인 인공지능(AI) 열풍도 국가물산업클러스터의 역할 확대론에 힘을 보탠다. AI 확산에 따라 반도체 산업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지만, 정작 반도체 강국인 한국이 필수 공정인 초순수 기술은 일본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기술 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해 정부는 초순수 플랫폼 센터 건립계획을 수립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초순수 플랫폼은 국가물산업클러스터와 설비 공정이 유사해 만약 대구에 온다면 건설 비용이 타 지역 대비 50% 수준이라는 게 업계 설명이다. 현 정부의 국정과제인 지역균형발전과도 맥락을 같이 할 수 있다.
여기에 물과 첨단산업 간 융합을 통한 물산업의 확장과 같은 지방 정부의 자구 노력도 선행돼야 한다는 게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구체적으로 물산업 업계는 △물과 에너지 융합 △하수처리장을 활용한 데이터센터 △미세플라스틱 등 특정화학물질 관리 등 핵심 솔루션들의 연구개발을 위한 물산업 전반을 관장하는 컨트롤타워 기관(한국물산업진흥원) 설립을 요구하고 있다. 정부는 물론 지방정부의 의지와 투자가 요구되는 사안이다.
부족한 입주기업들의 정주여건도 풀어야 할 과제다. 달성군 구지면은 지역 내 대표적인 '의료 사각지대'로, 간단한 입원도 차량으로 20~30분 이상 나가야 한다. 대중교통 접근성도 낮아 2030년 예정된 산업선 개통 전까진 불편함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지자체 차원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김정섭 대구시 환경수자원국장은 "전임 시장 시절에 신산업 위주의 정책을 펴다 보니 물산업이 침체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지만, 실질적으로 관심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라며 "현재 대구는 노후화된 상하수도관 교체 등 관련 공공 사업 규모가 늘고 있다. 이런 공공 시장에서 지역업체 물품 구매를 늘리고, 전시회를 여는 등 지역 물산업 진흥을 위해 다각적인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승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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