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만나는 우리동네 문화유산] 영주 보물 그늘에 숨은 ‘선사 흔적’...걸어서 만나는 청동기 그림

  • 권기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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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2-07 08:56  |  발행일 2026-02-07
영주시 가흥동 아파트 단지 옆으로 보물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 아래 선사유적 가흥리 암각화가 자리하고 있다. 권기웅 기자

영주시 가흥동 아파트 단지 옆으로 보물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 아래 선사유적 가흥리 암각화가 자리하고 있다. 권기웅 기자

영주 서천변 물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가흥동 아파트단지에서 불과 50여m 떨어진 바위벽에 청동기 사람들이 남긴 '칼집 무늬'가 숨어 있다. 보물인 마애여래삼존상에 가려 제대로 조명받지 못한 영주 가흥리 암각화가 "도시 한복판의 선사미술"로 재평가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6일 영주시 문화예술과 사공정길 지방학예연구사와 함께 가흥동 서천변 현장을 찾았다. 아파트 단지의 생활 소음이 아직 들리는 거리에서, 높이 솟아난 암석이 나타났다. 사공 연구사는 "여기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48호로 지정된 '영주 가흥리 암각화'"라며 "규모는 바위그림 1식, 높이 150cm, 너비 450cm로 기록돼 있다"고 말했다.


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바위·절벽·동굴 벽면 등에 기호나 물건, 동물 등을 새겨 남긴 흔적이다. 가흥리 암각화는 무엇보다 '접근성'이 특별하다. 사공 연구사는 "가흥동 아파트단지와 직선거리로 50여m 남짓이라 주민들이 마음만 먹으면 산책하듯 걸어서 둘러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라며 "대개 암각화는 외진 곳에 있어 찾아가기가 쉽지 않은데, 여기는 도시 생활권 안에 남아 있는 드문 사례"라고 했다. 실제로 서천변 국도와 산책로가 가까워, 길이 생기기 전에는 강물이 암각화 앞까지 닿았을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바위벽은 가까이서 보면 거친 화강암 표면이 드러나고, 새김이 남은 면은 수직에 가깝다. 암각의 핵심은 '검파형(劍破形)'이라 불리는 칼자루·칼집을 닮은 무늬다. 사공 연구사는 "여기 암각화는 선을 쪼아 파는 '선 쪼기' 기법으로 새겼고, 검파형 무늬만으로 구성돼 있다는 점이 특징"이라며 "외곽선 안쪽을 가로선 1~3개로 나누거나, 일부는 세로선이 들어가 내부를 분할한 흔적도 확인된다"고 설명했다. 무늬 배열은 6개가 불규칙한 간격으로 열을 이루고 상하에 3개 무늬를 배치한 형태로 전해진다.


검파형(劍破形)이라 불리는 칼자루·칼집을 닮은 무늬가 선명한 영주 가흥리 암각화. 권기웅 기자

'검파형(劍破形)'이라 불리는 칼자루·칼집을 닮은 무늬가 선명한 영주 가흥리 암각화. 권기웅 기자

'숫자'는 이 유산이 겪어온 관리·인식의 굴곡을 말해준다. 처음 발견(1989년) 당시에는 검파형 무늬가 10여 개 이상이라고 알려졌지만, 이후 바위 표면의 이물질을 제거하고 나서 현재는 9개의 무늬만이 선명하게 확인된 것으로 정리돼 있다. 또 다른 조사 기록에는 암각화가 15기 확인되며 중앙부에 선명한 암각이 집중되고 오른쪽 면은 흐릿하거나 중복 묘사된다는 기술도 있다. 사공 연구사는 "현장 보존·정비 과정, 관찰 조건에 따라 보이는 무늬 수가 달라질 수 있어 지속적인 기록 관리가 중요하다"며 "중요한 건 이 유산이 청동기 시대 예술·신앙·문화를 연구하는 데 의미 있는 자료라는 점"이라고 말했다. "검파형 암각화가 점차 도식화돼 가던 청동기 시기의 흐름 속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도 그의 설명이다.


이렇게 '가까이 있는 선사 유산'이 지역에서조차 존재감이 약했던 이유가 있다. 바로 위쪽 암반에 자리한 보물, '영주 가흥동 마애여래삼존상 및 여래좌상' 때문이다. 마애여래삼존상은 큰 자연 화강암을 그대로 이용해 바위벽에 새긴 불상으로, 가운데 본존불과 양옆의 보살이 갖춰진다. 본존불은 체구가 크고, 연꽃·불꽃무늬가 새겨진 광배가 장중한 인상을 준다. 여래좌상은 집중호우로 암반이 무너지며 새로 확인된 불상으로, 얕은 돋을새김 기법으로 조각됐지만 이목구비가 심하게 훼손돼 있다. 통일신라의 사실적 조각을 보여주는 보물급 불상이 현장 방문의 '주연'이 되다 보니, 그 아래 10m쯤 떨어진 암각화는 늘 '곁다리 코스'로 밀려났다는 게 지역 문화재 담당자의 시선이다.


사공 연구사는 "마애불이 눈에 확 들어오고 안내도 잘 돼 있다 보니, 많은 분이 '여기까지 왔으니 불상만 보고 가자'고 생각한다"며 "하지만 그 아래에 청동기 사람들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실 자체가 영주의 시간 층위를 보여준다"고 말했다. 선사에서 삼국·통일신라로 이어지는 시대의 단층이 좁은 공간 안에 포개져 있다는 점에서, 가흥리 암각화는 '가흥동 마애불을 이해하는 배경'이자 '영주 생활권 문화유산의 확장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장은 오히려 그 잠재력을 선명히 보여줬다. 도심과 맞닿아 있어 접근은 쉽지만, 그만큼 스쳐 지나가기 쉽다. 사공 연구사는 "이곳은 누구나 걸어서 갈 수 있는 유산인 만큼, 지역에서 '보물만 있는 곳'이 아니라 '선사부터 이어지는 문화지층'으로 묶어 해설·동선을 새로 짜는 게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마애여래삼존상에 집중된 시선을 암각화로 확장시키는 해설판 정비, 산책로 연계, 주민 참여형 도슨트 프로그램 같은 방식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아파트에서 50여m. 생활 반경 안의 문화유산이 '보물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한 조건은 거창하지 않아 보였다. 현장을 떠나며 사공 연구사는 마지막으로 "이 암각화는 화려하지 않지만, 청동기 사람들이 남긴 '표현의 방식'입니다. 가까운 곳에 남아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지금 우리가 더 자주 들여다봐야 할 이유"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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