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나은 세상] 남은 세월이 길다, 부디 바라건대

  • 정혜진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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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3-12 06:00  |  수정 2026-03-11 18:48  |  발행일 2026-03-12
정혜진 변호사

정혜진 변호사

지난 설 연휴에 S가 톡으로 사진을 한 장 보내며 안부를 전해왔다. 경북 영주에 와서 전시를 보고 있는데 글귀가 너무 좋아서 보낸다고 덧붙였다. 사진 속 나무 현판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연말이 멀지 않으니 당신 집의 경사가 시냇물이 바야흐로 흐르는 것처럼 무성하기를 바랍니다. The end of the year is not far away, so I hope that good things will be as lush as a stream in your house.


무슨 전시인지 궁금해서 물으니 소수박물관 특별기획전 '안부 - 간찰(簡札)에 얹어 보내는 사계절'이라고 알려준다(지난 2월 말에 종료되었다). 소수박물관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전시회 도록을 다운받을 수 있어 컴퓨터 화면으로나마 전시를 자세히 둘러볼 수 있었다.


'간찰'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주고받았던 편지를 말한다. 스마트폰은커녕 유선전화도 없던 시절 편지가 가장 빠른 통신 수단이었던 시절, 선비들은 간찰을 통해 당장 만날 수 없는 상대방의 안녕을 기원하고, 자신의 소식을 전하며 필요한 물건을 보내주거나 새로운 지식을 공유하면서 따뜻한 유대감을 드러냈다고 한다. 지인이 보낸 사진의 글귀는 류심춘이라는 선비가 1892년 쓴 편지로, 상대방과 나눈 대화를 통해 얻은 공부의 깨달음과 선현 학자들의 지혜에 감동한 내용을 전한 후의 마지막 안부 인사였다.


歲且盡 惟冀 慶余而得 尙盡


세차진(한 해가 거의 끝나가니)/ 유기(오직 바라건대)/ 경여이득(남은 복과 경사를 얻어)/ 상진(끝까지 잘 마치기를)


요즘 말로 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혹은 '꽃길만 걸으세요' 정도 되지 않을까 싶다. 조선시대 선비가 쓴 편지를 한자 원문이나 직역하지 않고 현대식 한글로 풀면서 영문 번역을 덧붙여 놓으니 안부 인사가 현대적이고 참신하게 느껴졌다.


그 글귀를 보낸 S가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S는 내가 국선변호인으로 일하며 만난 절도 피고인이었다. 동종 범죄 경력이 여럿 있었는데, S는 반복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자신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했고 재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유달리 강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내게 편지를 자주 보내왔다. 국선변호에 대한 감사와 함께 수형생활에서 겪은 사소한 일상, 면회 온 어머니 이야기, 직업 훈련을 받으며 사회 복귀를 준비하는 이야기, 출소를 기다리는 설렘과 각오를 전했다.


사실, 요즘 세상에 손편지를 쓰는 유일한 집단이 감옥에 있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다른 통신 수단이 없다는 점에 한정해서 보면 옛날 선비와 비슷한 처지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감옥에서 오는 S의 편지는, 전시 도록으로 본 조선시대 간찰처럼, 간절하고 애틋한 면이 있었다. S는 출소 후 감옥에서 배운 용접 기술을 활용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일을 하고 있다. 그런 그가 연휴에 어머니와 함께 여행 가서 들른 곳이 박물관이었다는 사실이 반갑고 기뻤다. 물어보지도 않았고 확인할 길도 없지만 S는 이제 다시는 감옥에 갈 짓은 안 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좋은 전시를 도록으로나마 보게 해 준 S에게 나도 옛 간찰 흉내를 내어 안부를 보내고 싶다(AI 도움을 받았다).


歲尙長 惟冀 多作福事 以終其生(세상장 유기 다작복사 이종기생)


아직 남은 세월이 길다. 부디 바라건대 생의 끝까지 복 짓는 일을 많이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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