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여행-경북 안동 단호리 낙암정] 도깨비 전설 얽힌, 정자는 붉은 벼랑위에 새집 마냥 앉았다

  • 류혜숙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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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3-14 15:50  |  발행일 2026-03-14
단재 도로에서 임도를 따라 50m 정도 내려가면 단호절벽 가운데에 자리한 낙암정을 만난다. 인근에서 낙동강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는 정자다.

단재 도로에서 임도를 따라 50m 정도 내려가면 단호절벽 가운데에 자리한 낙암정을 만난다. 인근에서 낙동강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는 정자다.

부지런한 몸이 지나간 밭고랑마다 비료포대가 턱턱 누워 있다. 보기만 해도 척추가 뻐근하다. 광활한 들은 텅 비어 있어도 차고 넘치는 느낌이다. 모내기는 5월인가. 들판 가운데에 선 정자나무 거목은 아직 잿빛이지만 오전의 햇살 속에서 어쩐지 연둣빛 싹 내음을 풍기는 것 같다. 미천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강변의 널따란 습지를 지나쳐 도로는 황량한 건지산과 낙동강 벼랑 사이를 비집고 오른다. 좁으나 말끔한 길이 고갯마루에 닿을 즈음 나뭇가지를 잔뜩 실은 빨간 경운기가 탈탈거리며 저편에서 고개를 내민다. 농부는 도롯가 마름모꼴의 작은 텃밭 옆에 나뭇가지를 부려놓고는 다시 고갯길을 내려간다. 탈탈탈탈, 따사로운 인기척이 멀어진다. 두 더미의 나뭇가지 너머 작은 연못이 반짝한다.


낙암정은 조선 세종 때의 문신인 배환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정자다. 도깨비들의 소동에 큰 바위가 굴러 떨어져 정자를 짓기 좋은 터가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낙암정은 조선 세종 때의 문신인 배환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정자다. 도깨비들의 소동에 큰 바위가 굴러 떨어져 정자를 짓기 좋은 터가 만들어졌다는 전설이 있다.

◆ 단호절벽의 낙암정


푸른 것들이 송송한 작은 텃밭 맞은편에 낙암정 안내판이 있다. 표석에 입로(入路)라 새겨져 있으니 거리가 제법 되는 모양이다. 비스듬히 내려가는 임도는 생각보다 넉넉하고 군데군데 나긋한 풀빛이 느껴져 아늑하다. 버석거리는 나무줄기 사이에 고인 하늘빛 강물이 저 먼 데서 옥빛으로 다가올 때, 정자의 팔작지붕이 그 유려한 속눈썹을 살짝 들어올린다. 비탈길에 멈추어 서서 그 모습을 한참 바라본다. 인근에서 낙동강 풍경이 가장 아름답다는 '낙암정(洛巖亭)'이다. 낙암정은 '낙동강 단애 위의 정자'다.


마을은 단호리다. 동쪽에서 흘러온 낙동강이 급하게 휘어지며 까마득한 절벽을 세웠는데, 그 절벽이 붉고 그 아래 물이 깊어 단호(丹湖)다. 절벽 위 고갯길은 단재라 불린다. 붉은 벼랑의 고개다. 강 건너 너른 들은 풍산읍 계평리의 들이다. 계평들에서 바라보면 단호절벽의 천 길 낭떠러지 가운데에 낙암정이 새집마냥 사뿐 내려앉아 있다고 한다. 그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낙암정이고, 가장 아름다운 낙동강은 낙암정에서 볼 수 있다는데, 나는 낙동강을 바라보는 낙암정이 보고 싶다. 낙암정의 매정한 등 뒤를 돌아 표정 모를 옆모습을 스쳐 마주선다. 그는 강물이 오는 것을 보고, 강물이 저 아래 발목을 쓰다듬고 지나가는 것을 느낀다. 때로는 사납게 치고 달아나는 물결도 느낄 것이다. 땅이 조금 축축하다.


낙암정은 조선 세종 때의 문신인 배환(裵桓)을 기리기 위해 문종 1년인 1451년에 후손들이 지은 정자다. 배환은 흥해배씨(興海裵氏) 안동 입향조인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의 둘째 아들로 이곳에서 말년을 보내고 싶어 했다고 한다. 낙암정은 방이 두 칸, 마루가 네 칸이다. 오랜 세월 여러 번 중수와 중창이 있었지만 단정한 고색을 지니고 있다. 애를 쓰고 무리를 하면 마루에 오를 수 있겠지만, 아무래도 먼 데만 쳐다보는 모습이 '나를 방해하지 말라'는 단호함으로 느껴져 그만둔다.


옛날 강변은 아주 넓은 모래밭이었다고 한다. 어느 날 배환은 벗들과 술을 마시고는 거나하게 취해 백사장에서 잠들어 버렸단다. 그때 지나가던 도깨비들이 그가 죽은 줄 알고 좋은 자리를 찾아 묻어주기로 했다. 도깨비들은 그를 메고 강 건너 절벽을 올랐다. "여기 어때? 좋은 묘 터가 되겠는걸." "아니야. 여긴 좋은 정자 터지 묘 터가 아니야." 그 사이 잠에서 깬 배환은 죽은 척 가만히 도깨비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가 "네 이놈들! 내가 죽긴 왜 죽느냐!"하고 고래고래 호통을 치며 일어났다. 놀란 도깨비들은 정신없이 달아났고 그 소동에 절벽 위의 큰 바위가 굴러 떨어져 정자를 짓기 좋은 터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바위가 떨어진 자리에 지은 정자라 낙암이라 했다는 전설이 있다.


벼랑의 가장 높은 자리에 전망 데크가 있다. 오른쪽이 건지산이다. 산불 이후 복구를 마친 상태다.

벼랑의 가장 높은 자리에 전망 데크가 있다. 오른쪽이 건지산이다. 산불 이후 복구를 마친 상태다.

풍산대교 양안에 습지가 넓다. 낙동강과 미천이 검암마을 앞에서 만나 습지가 만들어졌고 지금은 점점 자라나 단호리와 계평리 일대까지 펼쳐져 있다.

풍산대교 양안에 습지가 넓다. 낙동강과 미천이 검암마을 앞에서 만나 습지가 만들어졌고 지금은 점점 자라나 단호리와 계평리 일대까지 펼쳐져 있다.

◆ 단재를 넘는 벼랑길


안동에는 '유교문화 길'이 있다. 낙동강 물길을 따라 여러 전통마을과 유적지, 너른 들과 습지를 지나는 39.6㎞의 길이다. 그 출발점이 낙암정이다. 길은 낙암정 초입에서 벼랑을 오르는 로프형 목책길로 이어진다. 곁에 건지산자락이 나란하다. 화마가 지나간 산은, 처연한 기색이 감춰지지 않는다. 벼랑의 가장 높은 자리에 전망 데크가 있다. 옛 기록들을 찾아 따져보면 이곳을 마암(馬巖)이라 하는 듯하다. 아주 조용하다. 새소리도, 바람소리도,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저 아래 낙암정이 감지된다. 조금만 더 낭떠러지 가까이 가면 벼랑에 매달린 낙암정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전망대 울타리를 넘을 수 없다. 먼 마을과 산들의 실루엣이 뿌옇다. 저 멀리 3개의 돛을 가진 전장범선 같은 다리는 34번 국도의 서안동대교다. 가까운 다리는 중앙고속도로 풍산대교다.


전망대에 오르면 휘어 흐르는 강물과 광활한 계평들, 풍산대교와 검암습지, 멀리 서안동대교까지 한눈에 조망된다.

전망대에 오르면 휘어 흐르는 강물과 광활한 계평들, 풍산대교와 검암습지, 멀리 서안동대교까지 한눈에 조망된다.

전망대에서 단호리 마을 방향으로 내려간다. 아래 보이는 하얀 건물은 낙동강 생태학습관이다. 일대는 애초에 검암습지 생태공원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전망대에서 단호리 마을 방향으로 내려간다. 아래 보이는 하얀 건물은 낙동강 생태학습관이다. 일대는 애초에 검암습지 생태공원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풍산대교 양안에 습지가 넓다. 낙동강과 미천은 검암마을 앞에서 만난다. 그 남쪽에 토사가 쌓이고 풀과 나무가 자라나 습지가 만들어졌다. 그래서 검암습지다. 습지는 점점 자라나 지금은 단호리와 계평리 일대까지 펼쳐져 있다. 검암습지는 4대강 공사 때 참혹한 모습으로 사라졌지만 다시 돌아왔다. 습지는 이치에 대한 깊은 신뢰와 천진한 낙관을 갖게 한다. 지금도 휘어 흐르는 강물과 너른 들판과 가까운 마을을 바라보며 목책길을 내려간다. 저 아래 보이는 하얀 건물은 낙동강 생태 학습관이다. 안동의 습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작은 공간인데, 일대는 애초에 검암습지 생태공원으로 조성되었다고 한다. 학습관은 2021년부터 무인으로 운영되고 있다. 영상과 소리가 작동되지 않아 조금 서운하지만 아주 쾌적한 공간이다.


생태학습관 뒤편에 상락대 표석과 시비가 있다. 상락대는 고려 후기의 명장 김방경이 젊은 시절 무예를 연마하며 노닐었다는 곳이다.

생태학습관 뒤편에 상락대 표석과 시비가 있다. 상락대는 고려 후기의 명장 김방경이 젊은 시절 무예를 연마하며 노닐었다는 곳이다.

생태학습관 뒤편 벼랑은 고려 후기의 명장 김방경(金方慶)이 젊은 시절 무예를 연마하며 노닐었다는 상락대(上洛臺)다. 커다란 바위에 김방경의 복주(福州)라는 시가 새겨져 있다. 복주는 안동의 옛 이름이다. 그는 1281년 일본 쓰시마를 정벌하고 회군할 때 고향에 들러 이 시를 지었다. 노장은 고향의 모습이 어린 시절과 똑같아서 애틋하다고 했다. 상락대 벼랑의 덤불에서 파드득 새들이 날아오른다. 먼 도로에는 빨간 경운기가 또 나뭇가지를 가득 싣고는 고갯길로 향한다. 나뭇가지 더미 위에 한 젊은 이국의 여인이 앉아 무어라 종알거리는데, 탈탈탈 경운기 소리에 흩어져 들을 수 없다. 다만 그녀와 농부의 미소가 너무 커다래서 애틋하다.


글·사진=류혜숙 전문기자 archigoom@yeongnam.com


낙동강 생태학습관. 안동의 습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작은 공간으로 2021년부터 무인으로 운영되고 있다.

낙동강 생태학습관. 안동의 습지를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 작은 공간으로 2021년부터 무인으로 운영되고 있다.

>>>여행정보

55번 중앙고속도로 남안동IC로 나간다. 5번 국도를 타고 안동, 영주, 영양방향으로 가다 무릉교차로에서 무릉유원지, 무릉리 방면 오른쪽으로 빠져나가 남후면 방향으로 직진, 남후면소재지에서 단호, 개곡 방향으로 좌회전해 남일로를 타고 약 5.6㎞ 직진한다. 풍산, 단호, 낙동강생태학습관 이정표를 따라 우회전해 고갯길(풍산단호로)을 오르면 고갯마루에 닿을 즈음 낙암정 표지판을 만나고, 샛길을 따라 절벽을 내려가면 정자의 옆모습이 보인다. 낙암정 표지판 옆에 전망대로 오르는 길이 있다. 낙동강 생태학습관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운영하며 매주 월요일은 휴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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