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서 만나는 우리동네 문화유산] 천년 숲이 지켜낸 깨달음의 길, 봉화 각화사를 걷다

  • 황준오
  • |
  • 입력 2026-04-11 18:56  |  발행일 2026-04-11
실록을 품고 선맥을 이어온 태백산의 도량… 역사와 수행이 공존하는 깊은 산사의 시간
봉화 각화사 대웅전 전경. 단청의 색채와 기와선이 어우러진 법당 뒤로 각화산 자락이 펼쳐져 깊은 산사의 고요함을 전한다. 황준오기자

봉화 각화사 대웅전 전경. 단청의 색채와 기와선이 어우러진 법당 뒤로 각화산 자락이 펼쳐져 깊은 산사의 고요함을 전한다. 황준오기자

숲은 깊고 공기는 맑다. 산길은 말없이 사람의 속도를 늦춘다.


경북 봉화 춘양의 산자락을 따라 굽이진 길을 오르다 보면 어느 순간 세속의 소음이 희미해지고,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 소리만 또렷해진다. 그렇게 한 걸음씩 들어선 곳에서 천년의 시간을 품은 고찰이 모습을 드러낸다. 각화사다.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 고운사의 말사인 각화사는 신라 문무왕 5년인 665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전해진다. 수행과 교화의 길 위에서 수많은 사찰을 남긴 원효의 자취는 이곳에서도 이어진다. 처음에는 인근 지역에 자리했던 사찰을 옮겨오며 이름을 새롭게 붙였다고 한다. 깨달음을 꽃처럼 피워낸다는 의미가 담긴 '각화(覺華)'라는 이름은 사찰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사찰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누각이 있다. 숲 사이에 고요히 서 있는 월영루다. 달빛이 머무는 누각이라는 이름처럼, 이곳에 서면 주변 풍경이 한층 차분하게 다가온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자연스럽게 호흡이 가다듬어지고, 눈앞에 펼쳐지는 사찰의 공간은 마치 또 다른 세계로 들어서는 문처럼 느껴진다.


각화사가 지닌 역사적 의미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더욱 또렷해진다. 깊은 산중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은 국가의 중요한 기록을 보관하기 위한 장소로 주목받았다. 조선왕조의 역사를 기록한 실록을 보관하기 위해 태백산 사고가 설치되면서 각화사는 기록을 지키는 사찰로서 역할을 맡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태백산 사고지 일원. 깊은 산중에 자리한 지리적 특성 덕분에 국가 기록을 지키는 보존처로 활용됐다. 황준오기자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태백산 사고지 일원. 깊은 산중에 자리한 지리적 특성 덕분에 국가 기록을 지키는 보존처로 활용됐다. 황준오기자

험준한 산세와 접근하기 어려운 지형은 외부의 침입으로부터 기록을 보호하기에 적합한 조건이었다. 한때 수백 명의 승려가 머물며 수행과 수호의 역할을 함께 수행했던 이곳은 국가적 차원의 의미를 지닌 공간으로 자리했다. 현재 사고 건물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 터는 여전히 역사의 흔적을 전한다.


사찰의 기운은 유난히 깊다. 경내를 걷다 보면 다른 사찰보다 한층 고요한 분위기가 감돈다. 수행 공간으로 알려진 태백선원은 오랜 시간 정진하는 수행자들이 머무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선방의 수행 기간이 계절별로 나뉘는 것과 달리, 이곳에서는 더욱 긴 시간 동안 수행이 이어진다고 전해진다. 오랜 시간 머물러도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 도량이라는 평가가 뒤따른다.


경내 곳곳에는 수행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산자락에 자리한 작은 암자와 부도군은 이곳이 단순한 기도처가 아니라 수행 공동체의 중심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름 없이 정진했던 수행자들의 삶이 고요한 풍경 속에 스며 있다.


각화사가 품고 있는 문화유산의 가치도 적지 않다. 사찰에는 불화와 석조 유물 등 다양한 문화재가 전해지고 있다. 정교한 필선으로 표현된 불화는 당시 불교 미술의 특징을 보여주며, 거북 형상의 석조 받침은 섬세한 조형 감각을 보여준다. 장인의 손길이 남긴 흔적은 천년의 시간을 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각화사 소장 금봉암 아미타불회도. 아미타여래와 권속을 장엄하게 표현한 불화로 조선 후기 불교회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봉화군 제공>

각화사 소장 '금봉암 아미타불회도'. 아미타여래와 권속을 장엄하게 표현한 불화로 조선 후기 불교회화의 특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봉화군 제공>

사찰 주변 숲은 또 하나의 자산이다. 각화산과 백두대간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사계절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봄에는 연둣빛 기운이 산을 덮고, 여름에는 짙은 녹음이 길을 감싼다. 가을이면 낙엽이 쌓이고 겨울에는 적막한 설경이 펼쳐진다. 자연은 사찰의 일부처럼 이어진다.


국립백두대간수목원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이 사찰은 여행자들에게 잠시 숨을 고르게 하는 쉼터이기도 하다. 산을 찾는 사람들은 이곳에서 물을 마시고 풍경을 바라보며 다시 길을 준비한다.


각화사는 화려함을 앞세우지 않는다. 대신 긴 시간 축적된 고요함이 공간을 채운다. 누군가는 기도를 위해 찾고, 누군가는 산을 오르다 잠시 머문다. 그러나 이곳에 서면 누구나 잠시 생각에 잠기게 된다.


천년의 숲은 많은 것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 머무르며 시간의 무게를 전할 뿐이다. 각화사의 풍경은 바쁜 일상 속에서 잊고 지낸 질문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 걷고 있는가.


깊은 산중의 오래된 사찰은 그 질문에 서두르지 말라고 답하는 듯하다. 천년의 시간은 그렇게 오늘도 조용히 흐르고 있다.



기자 이미지

황준오

기사 전체보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생활/문화인기뉴스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