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의 영화 심장소리] 우리는 모두 집이 필요하다

  • 김은경 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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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5-14 16:12  |  발행일 2026-05-15
센티멘탈 밸류(요아킴 트리에 감독·2025·노르웨이 외)
영화 센티멘탈 밸류 스틸컷. 부드러움과 화해를 추구하는 감독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영화 '센티멘탈 밸류' 스틸컷. 부드러움과 화해를 추구하는 감독의 시선을 엿볼 수 있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극장 문을 나서면서 "아, 참 좋은 영화다"라고 중얼거리게 되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 '센티멘탈 밸류(Sentimental Value)'가 그랬다.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2021)의 요아킴 트리에 감독 영화다.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과 아카데미 국제영화상을 받았다. 제목인 '센티멘탈 밸류'는 '정서적 가치'라는 뜻으로, 추억이 담긴 물건을 말할 때 쓰인다. 영화의 첫 부분은 주인공 노라가 어릴 때 쓴 에세이로 시작한다. 자신이 '집'이라고 상상해 쓴 글을 통해, 부모님의 불화로 인한 상처를 털어놓는다. 집은 부모가 함께 살 때는 싸움으로 요란했고, 아버지가 떠난 후엔 침묵으로 가득했다고 쓴다. 자신이 집이란 사물이 되어서야 마음을 털어놓는다.


성인이 된 노라는 무대공포증을 가진 연극배우다. 막이 열리기 전에는 두려움으로 도망치려 하지만, 막상 극이 시작되면 카리스마 넘치는 배우로 열연한다. 혼자 살면서 가까운 관계를 맺지 않는 노라와 달리, 역사학자인 동생 아그네스는 안정적인 가정에 아이도 있다. 엄마의 장례식날, 오래전 집을 떠났던 아버지가 나타난다. 영화감독인 아버지는 15년 만에 노라를 위해 썼다는 시나리오를 내민다. 아버지와 소통이 되지 않는 노라는 당연히 거부한다. 대신 스타 배우가 그 역을 맡게 되지만, 역할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며 포기한다. 결국 배역을 맡아 연기하는 건 노라다. 아버지 방식의 사랑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진심을 알게 된 동생 아그네스가 언니를 설득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한 구절이라도 읽어보라며, 시나리오를 내민다.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리는 노라에 비해, 평탄하게 살며, 아버지와 관계도 나쁘지 않은 아그네스다. "넌 어쩌면 그렇게 멀쩡하게 잘 자랐니?"라는 언니의 질문에 동생이 말한다. "나에게는 언니가 있었어"라고. 부모님이 싸울 때마다 머리를 감겨주고, 함께 학교에 가는 언니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노라는 말없이 아그네스를 끌어안는다. 자신은 그토록 절망과 우울에 빠져있었지만, 동생에게는 보호자였음을 알게 된다. 마음이 아릿했다. 나와 여동생, 아버지의 관계가 떠올랐다. 어릴 때는 각별했지만, 성인이 되어서는 소통이 되지 않던 관계. 바쁜 부모님 대신 맏이로서, 보호자 역할을 했던 생각도 났다. 먼 나라 노르웨이의 이야기가 아닌, 우리 모두의 이야기였다.


영화의 또 다른 주인공은 집이다. 영화의 시작과 끝이 집이다. 생각해보면 최고의, 최후의 '센티멘탈 밸류'는 집이 아니던가. 나와 가족이 함께 부딪히며, 화해하며 살아온 집, 추억이 켜켜이 쌓여 있는 장소 말이다. 집이란 가족의 공간, 관계의 공간이다. 집이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곳인 동시에, 지친 마음을 보듬는 안전한 공간이어야 한다. 아버지가 노라를 위해 쓴 시나리오의 대사는 "나에게는 집이 필요해요"였다. 아무래도 그 대사가 노라를 움직여 영화를 찍도록 한 것 같다. 우리는 모두, 그런 집이 필요하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칸영화제 인터뷰에서 "온유함이 곧 새로운 저항 방식(Tenderness is new punk)"이라 말했다. 끝없는 자극과 경쟁의 시대를 거슬러 부드러움과 화해를 추구하는 감독의 시선이 놀랍다. 영화가 가진 힘과 위로를 경험하게 하는, 드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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