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칼럼]정재걸의 오래된 미래교육…보는 자만 존재한다

  • 정재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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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5-21 18:15  |  발행일 2026-05-22
보는 자만 존재한다
정재걸 대구교대 명예교수

정재걸 대구교대 명예교수

지난 호에 이야기한 '보는 자는 볼 수 없다'라는 명제는 단순한 역설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인식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뒤집는 말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보인다'는 것과 동일시한다. 눈앞에 드러나고 감각에 포착되는 것만을 실재로 간주하는 습관은 우리의 일상적 경험이다. 그러나 진정한 존재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자'다.


보이는 것은 언제나 대상이다. 대상은 어떤 방식으로든 인식의 장 안에 들어온다. 사물, 생각, 감정, 심지어 자아에 대한 관념까지도 모두 '보이는 것'으로서 의식 앞에 나타난다. 이때 간과되는 것은 이 모든 것을 '보고 있는 무엇'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나무를 본다면 나무는 보이는 대상이고 그 나무를 보는 주체는 배후에 있다. 이 주체는 동일한 방식으로 대상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다시 본다면 그것은 더 이상 '보는 자'가 아니라 또 다른 '보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보는 자는 결코 대상이 될 수 없으며 어떤 방식으로도 완전히 포착될 수 없다. 그럼에도 그것은 모든 경험의 조건으로서 항상 이미 존재한다. 이 점에서 보는 자는 경험의 내용이 아닌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존재로 규정해야 할까? 보이는 것일까, 보는 것일까? 만약 존재를 '드러남'으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항상 대상의 층위에 머물 수밖에 없다. 모든 드러남은 그 바탕이 필요하다. 보는 자는 바로 그 바탕이다. 그것은 스스로 드러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드러나게 한다. 마치 빛이 스스로를 보지 않으면서도 모든 것을 보이게 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사물을 보지만 그 사물을 드러내는 '봄' 자체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 '봄' 없이는 어떤 대상도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몸을 나라고 생각한다. 거울 속 얼굴을 보며 그것이 나라고 믿고, 이름을 부르면 반응하며, 늙어가는 육체를 자신의 존재라고 여긴다. 하지만 몸은 끊임없이 변한다. 어린 시절의 몸과 지금 늙은 몸은 전혀 다르며, 세포는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한다. 기억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자신이라고 믿는 성격, 취향, 가치관은 시간과 경험 속에서 계속 변화한다. 이렇게 변하는 것들의 총합을 과연 '진정한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는 슬프다', '나는 생각한다'고 말하지만 슬픔도 생각도 이미 관찰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모든 것을 인식하는 '나'는 무엇인가? 그것은 특정한 내용이 아니라 내용이 나타나는 자리, 즉 순수한 보는 자다.


보는 자는 어떤 속성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색깔도 형태도 성질도 없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은 모두 대상의 특성이기 때문이다. 보는 자는 오히려 모든 특성이 나타나는 비어 있는 장과 같다. 그렇기에 그것은 어떤 것으로 규정될 수 없고 개념으로 포획될 수도 없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바로 그러하기에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 '존재한다'. 그것은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은 항상 변한다. 대상은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형성되었다가 해체된다. 그러나 보는 자는 이러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자리로 남아 있다. 그것은 시간 속의 사건이 아니라 시간의 흐름을 가능하게 하는 배경이다.


우리는 존재를 대상의 집합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진정한 존재는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있음이 드러나는 자리'다. 그 자리가 바로 보는 자다.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없지만 항상 그것으로 존재한다.


보는 자를 찾으려는 시도는 대상화의 방향이 아니라 대상화의 한계를 자각하는 데서 시작된다. 보이는 모든 것을 내려놓을 때 남는 것은 어떤 '것'이 아니라 '봄' 자체이다. 그리고 바로 그 '봄'이야말로 가장 근원적인 의미에서의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여러 선사가 제자 앞에서 손바닥으로 탁자를 치고, 죽비를 흔들며 '이것밖에 없다'고 설법한다. 제자가 탁자를 치는 소리를 듣고, 또 눈앞에 흔들리는 죽비를 바라봄으로써 스스로 보는 자를 알아차리게 하기 위함이다. 또 어떤 선사는 눈앞에 바나나가 있다고 상상하라고 하고 그 바나나를 치운 자리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묻기도 한다. 바나나를 치운 그 자리에 무엇이 존재하는가? 바로 '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보는 자만 존재한다'는 명제는 현실을 부정하는 허무주의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실 세계를 더욱 자유롭고 깊게 살아가게 하는 통찰이다. 삶은 계속된다. 우리는 일하고, 사랑하고, 슬퍼하고, 실패한다. 그 모든 경험의 중심에는 흔들리지 않는 침묵의 목격자가 있다. 참된 존재는 이야기 속 주인공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가능하게 하는 깨어있음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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