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철균의 ‘지방의 눈으로 AI읽기’] 문경 한지와 AI 예술

  • 유철균 경북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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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6-07 16:34  |  발행일 2026-06-09
유철균 경북연구원장

유철균 경북연구원장

경북 문경에 김삼식이라는 한지 장인이 산다. 9살에 친척의 닥공장에 들어간 뒤 70년 넘게 닥나무를 재배하고, 베고, 찌고, 껍질 벗기고, 칼로 긁고, 말리고, 두들기고, 닥풀을 먹여 전통 한지를 만들었다. 75살에 국가무형유산 한지장이 되었고, 80이 된 올해까지 문경 농암면 내서리에서 늙었다.


우리는 유튜브로 이 노인이 새벽 3시에 일어나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닥나무를 찌는 동영상을 본다. 밭에서 막 베어낸 닥나무는 그대로 두면 껍질이 단단하게 달라붙어 분리하기 어렵다. 증기로 천천히 푹 쪄야 껍질을 쉽게 벗기는데, 이 벗겨낸 껍질이 한지를 만드는 닥섬유의 시작점이 된다. 노인은 좋은 전통 한지를 만들기 위해 기계를 쓰지 않고 오랜 시간, 느리게 흘러가는 자연의 방식으로 찐다.


"자연으로 할 수 있는 거는 뭐든지 씸(힘) 드러여. 또 속도가 느리여. 허허허. 그라이 언늠이 (이런 일을) 할라카나. 허허허."


내서리 도장산의 흙과 나무를 닮은 잔잔하고 넉넉한 웃음이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제철이 되면 묵묵히 피어 자기 살이(生)를 버티는 들꽃의 웃음이다. 우리는 천년을 이어온 신라 한지 공예의 긍지와 자신의 몸을 자연의 도구로 내주던 민초들의 마음을 엿본다.


1966년 경주 불국사 석가탑을 보수할 때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751년 신라 경덕왕 때 간행된, 현존하는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이다. 경전은 돌 틈에서 썩지도 바스러지지도 않고 1215년을 버틴 종이의 품질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이 신라 종이는 찌는 듯한 여름의 폭염과 폭우와 습기, 혹독한 겨울의 냉기와 눈보라를 1215번 이겨내고 경전을 판독가능한 상태로 세상에 내놓았던 것이다.


신라 한지 공예를 계승한 전통 한지는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종이다. 문경을 비롯한 전국의 전통 한지 공방은 이 자부심 하나로 궁핍한 현실을 견디고 있다. 전통한지업체는 1996년 64개에서 2022년 19개로 줄었다. 정부는 우리 전통 한지가 루브르 박물관의 문화재 복원에 활용되었다고 자랑만 할 뿐 실질적인 지원은 없다. 오히려 수입 닥나무를 사용하고 기계로 대량 생산하는 실용 한지를 전통 한지와 똑같이 취급해서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게 하고 있다.


한국산 닥나무는 태국, 베트남, 라오스산 닥나무와의 가격 경쟁에 밀려 재배가 중단되고 있다. 한국산 닥나무는 애기닥나무 암꽃과 꾸지나무 수꽃이 수분하여 만들어진 특수한 교잡종이다. 전통 한지는 질기고 가는 장섬유를 가진 애기닥나무의 장점과 장섬유, 단섬유가 섞여 있고 성장이 빠른 꾸지나무의 장점이 결합되었기에 세계 최고의 내절강도와 인장강도를 갖는다. 지금 전통 한지는 한국산 닥나무라는 원재료의 소멸 앞에 서 있다.


문경 한지의 아름다움은 소멸해 가는 전통의 우수가 서린 아름다움이다. 경북연구원은 이 애틋한 마음을 '문경 한지-시간의 층'이라는 AI 영상으로 만들었다. 전통 다큐멘터리 영화의 형식에 뮤지엄 전시 영상의 형식을 섞은 헤리티지 시네마 아트 영상이다. 이 영상은 현재 유튜브에서 볼 수 있다. 2년 후 이 영상은 경북연구원이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문화기술개발 과제로 만들고 있는 '복합관광 AI'에 영어권 관광객들에게 한국 여행 계획을 짜주면서 경북의 문화유산을 소개하는 AI 답변의 말미를 장식하게 된다.


'문경 한지-시간의 층'에서 카메라는 장인의 손주름, 닥나무 껍질의 파열면, 한지의 섬유질 결을 극단적인 클로즈업 숏으로 들여다본다. 이런 클로즈업에서 카메라는 한지 한 장이 완성되기까지 쌓이고 또 쌓이는 시간의 피부를 보여준다.


조명은 렘브란트의 그림들처럼 측면에서 단일 광원으로 들어간다. 처음에는 종이에 반사되는 자연광의 산란을 보여주지만 나중에는 종이의 닥섬유가 스스로 빛을 내는 듯한 초현실적인 조도가 된다. 8세기의 신라 종이가 가졌던 아름답고 이상적인 질감, 문경 한지가 도달하려는 이상을 표현한 것이다.


'문경 한지-시간의 층' 같은 영상은 AI 예술의 범주에 속한다. 어쩌면 AI 예술이 지향해야 할 궁극의 목표가 문경 한지 같은 경지인지도 모른다. 낭만주의 이후 사람들은 예술에서 세상에 둘도 없이 새로운 것을 만드는 '혁신적 창의성'을 추구했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의 예술은 과거의 장인들처럼 이미 있는 것을 선택하고 결합하고 재배열하는 '조합적 창의성'을 찾고 있다.


'미드저니' AI에는 인류 역사의 대표적 화가, 사진가 1천546명의 작품이 학습되어 있다. 한지 장인이 옛 장인들의 기술을 선택, 결합, 재배열하듯이 AI 예술가는 1천546명의 기법과 스타일을 치열하게 선택, 결합, 재배열한다. 그 결과로 나타나는 것은 저렴하고 실용적이며 장인적인 민중 공예이다.


문경 한지는 저렴하다. 문경 한지는 실용적이다. 문경 한지에는 장인의 혼이 담겼다. 이 저렴성, 실용성, 장인성의 민중 공예야말로 AI 예술의 모델이다. 아름다움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물건보다 어딘가에 쓰이기 위해서 만들어진 물건이 더 아름답다. 이것은 존 러스킨이 중세 장인의 손노동에서 진정한 인간적 존엄을 발견하고 야나기 무네요시가 이름 없는 조선 도공이 빚은 막사발에서 '우리가 경애해야 할 예술'을 발견했던 그 생각들과 상통한다.


'문경한지-시간의 층'이라는 생성형 AI 영상은 갤러리에 걸리지도 않고 영화제의 레드 카펫에 인도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지역의 이야기를 지구 반대편의 먼 곳까지 데려간다. 접근은 쉽고, 비용은 낮고, 만든 이의 이름은 조용하다.


우리는 AI를 이용해서 전례 없이 쉽게 영상을 창작할 수 있다. 그런 영상은 전문적인 고급 예술이 아니다. AI가 만드는 영상은 확률적 생성이라는 구조적인 한계 때문에 창작자가 세부 사항을 정밀하게 제어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지 장인이 닥나무를 생장시키는 자연의 한계들을 받아들이듯 AI 예술을 만드는 우리는 자신의 민중 공예에 확률적 생성이라는 한계를 받아들인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아직 이름이 붙지 않은 미래의 예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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