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인생 2막의 아지트를 만들다

  • 이찬희 법무법인 율촌 고문·전 대한변호사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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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6-14 15:35  |  발행일 2026-06-15
이찬희 법무법인 율촌 고문·전 대한변호사협회장

이찬희 법무법인 율촌 고문·전 대한변호사협회장

인생의 대부분을 열심히 살았다. 특별한 목표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투자한 시간이 많다 보니 어느 정도 사회적 성취도 이루었다. 함께 근무하는 동료들만큼이나 훌륭한 전망을 가진 사무실이 있는 로펌에서 근무하고 있다. 이런저런 조직의 대표를 맡다 보니 곳곳에 꽤 넓은 집무실들이 있다. 그런데, 지금 나는 진정 행복한가?


불현듯 정신없이 사느라 미뤄 두었던 화두가 삶의 중심으로 다가왔다. 젊은이들 말로 '현타'가 온 것이다. 보이기 위한 공간이 아니라, 오롯이 나만의 생각과 시간을 담아낼 수 있는 작은 우주를 갖고 싶어졌다. 조용히 책도 읽고, 살아온 인생을 되돌아보며 정리할 아지트가 필요했다. 현실과 항상 괴리가 있는 듯 보이지만, 꿈은 간절하면 이루어진다.


좋은 인연이 있어 요즘 핫플레이스로 꼽히는 서울 성수동 끝자락에 작은 공간을 마련했다. 성수동은 묘한 매력이 있다. 전 세계 다양한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칠 정도로 몰려오는 핫플부터 언제 재건축이 될지 모르는 한적한 시장통까지 1980년대부터 2020년대가 공존하고 있다. 한 바퀴 산책하면 대학 시절부터 현재까지 파노라마처럼 돌아가고 있다.


커피 한 잔의 향기가 방을 가득 채울 정도로 작은 공간이지만, '이변의 인상연구소'라는 명패도 붙였다. '이변'은 변호사인 필자를 약칭해서 부르는 말이기도 하지만, 뜻밖의 일이라는 의미도 있다. '인상' 역시 필자가 두 번째 다닌 대학에서 전공한 관상학을 의미하는 인상이라는 뜻도 있지만, 인생상담의 준말이기도 하다.


세상과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도 완전히 단절되지는 않은 곳이다. 읽고 싶었으나 시간 부족을 핑계로 장식물이 되어 지내던 책들이 손길을 받고 있다. 시험이나 필요한 정보를 위한 젊은 시절의 독서와 달리 문장 하나에 오래 머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철학자의 질문을 곱씹고, 역사 속 인물의 고민을 지나온 삶에 투영할 수 있는 연륜 속에서 책을 읽으니 다시 가슴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은퇴를 조금씩 준비할 나이가 되었다. 인생의 끝자락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은퇴는 사실 직업이라는 명함이 사라질 뿐 진정한 자신을 만날 좋은 기회이다. 예순 넘게 살았으니, 더 이상 '무엇을 이룰 것이냐'가 아니라 '어떻게 정리할 것이냐'가 삶의 주제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바꾸기보다 자신과 타인을 더 깊이 이해하고, 인생의 본질에 가까워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주말을 가득 채우던 모임과 골프 대신 오늘 이 시간,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아지트에서 책 한 권을 펼치고, 커피 한 잔 마시며, 조용히 칼럼을 쓴다. 앞으로 창밖의 계절이 바뀌는 것을 바라보면서 인간과 종교, 사랑과 죽음, 그리고 희망과 행복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들을 만들 것이다. 행복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더 높은 곳에 오르는 데 있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작은 방 하나, 오래된 책 한 권, 그리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 속에 숨어 있다.


요즘 주변에 주식이나 부동산 가격의 급등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보고 있다. 한편으로는 이 기회에 편승하지 못하고 '포모(Fear Of Missing Out)증후군'으로 겪지 않아도 될 소외감을 느끼는 모습도 보고 있다. 주식 1주 없고, 20년 넘게 같은 집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인생 2막의 진정한 풍요는 통장 잔고가 아니라 마음의 깊이에서 나온다는 믿음 속에서 '아침을 열며'에 기고를 시작한 이후 처음 나만의 작은 공간에서 이 글을 쓴다. 무척이나 행복한 주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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