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바다, 경주의 동해④] 바다와 마을 사이, 소나무숲에 머물다

  • 이은임·이지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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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6-09-04 06:57  |  발행일 2026-09-04
소나무 사이로 비껴든 바다…밤이 오면 하늘 가득 별을 보다
경주 관성솔밭해변의 소나무 아래에 텐트와 차량이 자리 잡고 있다. 경주시는 2000년대 후반부터 해변을 따라 해송을 추가로 심었으며, 2018년 간벌한 공간에 1.4㎞ 길이의 테마길을 조성했다.

경주 관성솔밭해변의 소나무 아래에 텐트와 차량이 자리 잡고 있다. 경주시는 2000년대 후반부터 해변을 따라 해송을 추가로 심었으며, 2018년 간벌한 공간에 1.4㎞ 길이의 테마길을 조성했다.

몽돌·모래 섞인 해변 이어진 관성솔밭

바닷바람과 모래 막는 완충지대 역할

차박·노지캠핑 명소로 관광객에 인기

눈길끄는 바위군락 가득한 포구 '수렴항'

해파랑길 경주 구간 시작점 지경해변

다채로운 양남의 세 바다 풍경에 감탄

도로를 벗어나 소나무 사이로 몇 걸음 들어가자 늦여름의 빛이 잘게 부서졌다. 발밑에는 마른 솔잎이 겹겹이 쌓였고, 짙은 솔향에 바다의 짠 내음이 섞여왔다. 나무 사이로 동해가 나타났다 사라졌다. 바다는 바로 앞에 있었지만 숲 안에서는 파도보다 솔잎 밟는 소리가 먼저 들렸다.


이곳은 경주시 양남면 관성솔밭해변. 9월이 왔지만 늦더위에 아직은 여름인 주말이었다. 소나무 아래에는 텐트가 들어서고, 바다를 향해 세운 차들은 트렁크를 활짝 열어놓았다. 물가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젖은 발의 모래를 털고 나무 그늘에 앉았다. 차 문을 열면 소나무 사이로 바다가 들어왔다.


관성솔밭을 중심에 두면 양남의 바다가 남북으로 펼쳐진다. 북쪽에는 수렴항이 있고,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지경해변이 나온다. 같은 바다가 포구와 경계의 갯바위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달라지는지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뜨겁던 몸 안으로 서늘한 숲이 들어왔다.


경주시 양남면 관성솔밭해변의 해송림과 백사장이 맞닿아 있다. 관성해수욕장으로 불리다가 2011년 관성솔밭해변으로 이름을 바꿨다. 해송림 안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머물 수 있어 차박과 노지캠핑 장소로 알려져 있다.

경주시 양남면 관성솔밭해변의 해송림과 백사장이 맞닿아 있다. 관성해수욕장으로 불리다가 2011년 관성솔밭해변으로 이름을 바꿨다. 해송림 안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머물 수 있어 차박과 노지캠핑 장소로 알려져 있다.

◆관성솔밭, 별을 본다는 이름의 숲


관성솔밭해변은 경주 동해안의 남쪽, 울산과 경계를 맞댄 양남면 수렴리에 있다. 모래와 몽돌이 섞인 해변을 따라 소나무숲이 길게 이어진다. 오랫동안 '관성해수욕장'으로 불렸지만 2011년 8월 '관성솔밭해변'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마을에서 만난 사람들마다 그저 옛날부터 있던 숲이라고만 했다. 지금의 솔밭이 언제 처음 만들어졌는지를 알려주는 기록은 뚜렷하지 않다. 다만 오늘의 숲이 한 시기에 완성된 것은 아니다.


경주시는 2000년대 후반부터 해변을 따라 해송을 추가로 심었다. 2018년에는 빽빽하게 자란 나무를 솎아낸 자리에 1.4㎞ 길이의 산책로를 내고, 태양광과 풍력을 이용하는 발전시설과 야간 조명도 설치했다. 먼저 자란 나무와 뒤에 심은 나무, 그 사이로 난 길이 시간을 달리하며 지금의 숲을 이루고 있다.


해송의 우리 이름은 곰솔이다. 검은빛을 띠는 나무껍질 때문에 '검솔'에서 곰솔이 됐다는 이야기와, 일반 소나무보다 굵고 억센 솔잎에서 이름이 비롯됐다는 설이 있다. 곰솔은 소금기 섞인 바람과 메마른 모래땅에서도 잘 견딘다. 해안의 소나무숲은 바람을 누그러뜨리고 모래가 안쪽으로 날리는 것을 막는다. 관성솔밭에서도 바다에서 곧장 밀려온 바람은 나무 사이를 지나며 한결 부드러워졌다. 숲은 바다와 마을 사이에서 빛과 바람을 한 번 걸러주는 완충지대가 됐다.


솔밭의 내력보다 오래된 것은 '관성'이라는 이름이다. 1910년대 초 전국의 지명을 조사해 작성한 '조선지지자료'에는 당시 장기군 양남면 수렴리에 '관성주막'이 있었다고 적혀 있다. 100여 년 전에도 사람들이 이 일대를 관성이라 불렀다는 기록이다.


관성(觀星)은 글자 그대로 '별을 본다'는 뜻이다. 마을에는 시계가 없던 시절 별을 보고 시간을 헤아리던 시설이 있어 이런 이름이 붙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낮에는 소나무 사이로 바다를 보고, 밤에는 나무 위로 별을 보는 곳. 오래된 마을 이름은 오늘날 솔밭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여행자들의 풍경과 자연스럽게 포개졌다.


숲을 빠져나오자 햇빛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수렴항의 방파제와 앞바다의 바위 군락이 보였다. 발걸음을 옮길수록 솔잎의 낮은 소리는 멀어지고, 바위에 부딪치는 파도 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경주 양남 수렴항에 있는 황새 그림 뒤로 황새바위가 보인다. 이 바위에는 예부터 황새가 자주 찾아왔다고 한다. 수렴항은 2018∼2021년 112억원을 들인 어촌뉴딜300 사업을 거쳐 경북에서 가장 먼저 사업을 마친 포구다.

경주 양남 수렴항에 있는 황새 그림 뒤로 황새바위가 보인다. 이 바위에는 예부터 황새가 자주 찾아왔다고 한다. 수렴항은 2018∼2021년 112억원을 들인 어촌뉴딜300 사업을 거쳐 경북에서 가장 먼저 사업을 마친 포구다.

경주 양남 수렴리에 있는 할매바우.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이 바위를 마을을 지켜주는 존재로 여겼고, 정초에는 어민의 무사고와 무사 귀환을 기원하며 제를 올렸다.

경주 양남 수렴리에 있는 할매바우.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이 바위를 마을을 지켜주는 존재로 여겼고, 정초에는 어민의 무사고와 무사 귀환을 기원하며 제를 올렸다.

경주 양남 수렴리에 있는 할매바우.

경주 양남 수렴리에 있는 할매바우.

◆수렴항, 수영포의 기억과 영험한 바위


관성솔밭 북쪽에는 수렴항이 있다. 규모는 아담하지만 방파제와 작은 어선, 앞바다의 바위 군락이 한데 어우러진 포구다.


항구에 들어서면 먼저 바위들이 눈에 들어온다. 크고 작은 바위가 무리를 이뤄 수면 위로 솟아 있다. 이 바위 군락은 황새가 날아들어 쉬었다고 해서 황새바위라고도 하고 바다 위에 길게 누운 모습이 함선을 닮았다고 해서 군함바위라고도 부른다. 동쪽으로 시야가 열린 바위 군락은 일출 촬영지로도 알려져 있다. 해가 오르면 검은 바위의 윤곽이 먼저 드러나고, 그 사이로 붉은빛이 번진다.


황새바위 전망대에 서면 수렴항의 윤곽이 한눈에 들어온다. 방파제가 바다를 감싸고 그 안에 작은 어선들이 몸을 붙이고 있다. 방파제 안의 물은 잔잔하지만 바깥의 파도는 바위에 부딪쳐 흰 물보라로 흩어진다. 파도가 밀려오면 바위 사이의 좁은 틈에서 소리가 터지고, 물이 빠질 때는 자갈과 돌이 서로 부딪치며 낮은 마찰음을 낸다. 넓은 백사장에서 길게 풀리던 파도는 이곳에서 부서지고 울리며 여러 겹의 소리가 됐다.


수렴마을의 옛 이름에도 바다의 역사가 남아 있다. 임진왜란 때 수군의 병영이 있어 '수영포'라 불렸고, 영험한 바위가 있어 '영암'이라 불리던 마을이 합쳐지며 수렴리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지금의 정돈된 항구 뒤에는 자연재해에 취약했던 마을의 시간이 있다. 수렴마을은 태풍이 닥칠 때마다 높은 파도가 방파벽을 넘으면서 침수 피해를 겪었다. 도로와 방파벽 사이도 좁아 주민과 차량이 다니기에도 불편했다.


수렴항은 2018년부터 2021년까지 어촌뉴딜300 사업을 거치며 경북에서 가장 먼저 어항재생사업을 마쳤다. 월파 방지시설 등 재해예방시설을 확충하고 보행환경을 정비했다. 달빛광장과 황새바위 조망공간, 해양레포츠 체험장도 조성했다. 수렴천 위에는 약 100m 길이의 보도교를 놓아 관성솔밭해변과 수렴항 사이의 끊긴 해안길을 이었다.


달빛광장 한편에는 이 같은 변화 속에서도 오래 자리를 지켜온 작은 바위 하나가 있다. 수렴마을 사람들이 '할매바우'라 부르는 바위다. 주민들은 오래전부터 이 바위를 마을을 지켜주는 존재로 여겼고, 정초에는 어민의 무사고와 무사 귀환을 기원하며 제를 올렸다.


먼 바다에는 황새바위와 군함바위가 있고, 마을 가까이에는 할매바우가 있다. 수렴항에서는 바위마다 이름이 있었고, 이름마다 바다를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경주와 울산의 경계에 자리한 지경해변. 모래사장보다 검은 갯바위가 두드러지며, 해파랑길 10코스가 지경해변에서 관성솔밭과 수렴항을 지나 양남 주상절리로 이어진다.

경주와 울산의 경계에 자리한 지경해변. 모래사장보다 검은 갯바위가 두드러지며, 해파랑길 10코스가 지경해변에서 관성솔밭과 수렴항을 지나 양남 주상절리로 이어진다.

지경해변 갯바위 사이의 작은 굴 안에서 바라본 동해.

지경해변 갯바위 사이의 작은 굴 안에서 바라본 동해.

◆지경해변, 경주 동해안의 남쪽 끝


지경은 '땅의 경계'를 뜻한다. 이곳을 지나면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에서 울산광역시 북구로 행정구역이 바뀐다. 부산 오륙도에서 강원 고성까지 동해안을 잇는 해파랑길도 이곳에서 경주 구간으로 들어선다. 지경해변에서 시작된 길은 관성솔밭과 수렴항, 양남주상절리를 지나 나아해변과 문무대왕릉, 감포항을 거쳐 경주의 북쪽 바다로 이어진다. 한 도시의 해안에 숲과 포구, 지질과 신라의 역사가 차례로 놓여 있는 셈이다. 그 긴 길의 남쪽 첫머리가 지경해변이다.


지경해변은 모래사장보다 갯바위 풍경이 두드러진다. 파도에 씻긴 바위는 검게 빛나고 움푹 팬 자리에는 바닷물이 고여 작은 웅덩이를 만든다. 바위틈에는 해초와 조개류가 붙어 있고, 물이 빠질 때마다 감춰졌던 바위의 굴곡이 드러난다.


잠시 바위 곁에서 밀려왔다 물러나는 파도를 바라봤다. 물이 들어올 때마다 바위 사이의 웅덩이는 바다와 이어졌다가, 물이 빠지면 다시 작은 물웅덩이로 남았다.


조금 더 걸어가자 바위 사이에는 사람 하나가 몸을 낮춰 들어갈 만한 작은 굴이 있었다. 허리를 숙이고 안으로 들어간 뒤 뒤를 돌아보면, 바깥에서 끝없이 넓어 보이던 동해가 검은 바위의 틀 안에 담긴다. 굴 안은 그늘지고 서늘했다. 바깥의 사람 목소리는 멀어지고 물소리만 가까워졌다.


굴을 빠져나와 경계를 향해 조금 더 남쪽으로 걸었다. 어디까지가 경주이고 어디서부터 울산인지 바다만 보고서는 알 수 없었다. '지경'이라는 이름은 땅의 경계를 가리키지만, 바다에는 그 선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지경에서 보아야 할 것은 경주의 끝이 아니라 그 너머로 이어지는 바다인지도 몰랐다.


해가 기울 무렵 다시 관성솔밭으로 돌아왔다. 텐트에 불이 하나둘 켜지고, 파도 소리 위로 사람들의 낮은 말소리가 포개졌다. 나무 사이의 바다는 처음보다 어둡고 깊은 빛을 띠었다.


어둠 속에서 소나무들은 저마다의 간격을 두고 서 있었다. 숲을 이루는 것은 나무만이 아니었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빈틈까지가 숲이었다. 그 틈으로 빛이 들고 바람이 지났으며, 멀리 있던 바다가 푸른 조각으로 들어왔다. 나무들은 서로의 거리를 지우지 않은 채 바닷바람을 나누어 견디고 있었다.


고개를 들자 나무들이 비워둔 자리에 별 하나가 떠 있었다.


관성(觀星). 별을 본다는 이름의 밤이었다.


글=이은임 영남일보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이지용기자 sajahu@yeongnam.com


<공동기획 - 경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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