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정혜 경제·산업팀장
박민규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는 백화점에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마이카 붐'이 일기 시작한 무렵이라 했으니 80년대 중후반쯤이었다. 작가는 백화점에서 주차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인공을 통해 당시의 백화점 문화와 시대상을 보여주는데, 그중 하나가 지금은 사라진 '엘리베이터 안내원'이다. 이런 구절이 있다. '엘리베이터 걸(안내원)은 강렬한 원피스와 모자, 마스크라 봐야 할 정도로 진한 화장과 단정하지만 오버하는 몸동작과 말투…'.
그때 머릿속 불쑥 들어온 그림은, 엄마 손을 잡고 구경다니던 대백이었다. 남문 옆으로 나란히 있었던 몇 대의 엘리베이터에는 소설 속 표현처럼 투피스 차림의 정장과 모자를 쓴 안내원이 있었다. 단정하지만 과장된 몸짓으로 손님들을 맞이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대백은 화려했고 활기찼다. 명절이나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지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사람으로 북적였고, 때때로 들려오는 음악도 생기를 더했다. 엄마 손 잡고 구경가던 꼬맹이때부터 성인이 되어 친구들과 다닌 그때까지도 대백은 대구사람들이 가장 즐겨찾는 장소, 어쩌면 대구를 상징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30여년이 흐른 지금의 대백은. 전국 유일하게 남아있는 향토백화점이라는 수식이 무색하다. 잇따른 매각 무산에 바람 잘 날 없다. 지방 향토백화점들이 쓰러지던 1997년 외환위기(IMF)도 거뜬히 넘겼다. 매출로 전국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다. 밀레니엄시대가 개막하고 변화의 물결이 몰아치던 2000년대 초반까지도 끄떡없었다.
대백으로 불리던 본점은 어느새 문 닫은지 4년이 넘었다. 시장에 나온 물건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지만 마땅치 않은 것 같다. 대구 제일 상권은 여전히 동성로이고, 그 동성로를 대표하는 곳이 대백 아니던가. 아무리 부동산경기가 침체됐다고 하더라도 시장에서 팔리지 않을 물건이 아니라는 말인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가 보다.
대구라는 도시의 기억과 정체성을 살릴 건실한 매수자를 찾기 바라는 시민들의 바람 뒤로, 몸부림을 쳐봐도 빠져나오지 못한 늪처럼 한계에 부딪친 기업인이 보였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먹고 살 길 막막한 직원과 협력업체도 보이면서 연민도 느껴진다. 그만큼 많은 사랑을 받은 향토기업이라는 방증이다.
수년째 문 닫힌 대백은 대구 경제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섬유·제조산업으로 일찍이 산업화를 이룬 대구는 80~90년대만 해도 '전국 3대 도시'로 명성을 떨쳤다. 2026년을 살아가는 지금 대구가 보여주는 경제적 무게감이 다르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대백의 경영권 매각이 또 한번 무산된 올여름, 대구에서 중견건설사 태왕이앤씨가 기업회생절차를 신청했다는 소식이 더해졌다. 주택브랜드 태왕아너스로 더 많이 알려진 향토 건설사로, 불과 3-4년 전만 해도 여자 프로골프단을 창단해 운영할 만큼 전국적으로 사업영역을 넓히던 기업이다. 근데 법정관리를 받아야 할 만큼 자금 경색을 겪고 있다. 임직원 퇴직금조차 미지급됐을 정도다.
대구 부동산경기가 일시에 냉각되면서 건설사 수주 물량은 급감했고, 금리는 높아져 금융비용은 눈덩이처럼 불었다. 특수목적법인을 설립해 직접 투자한 개발사업도 경기 침체를 정면에서 맞아 일시적 유동성이 아예 바닥이 난 상태다.
대백의 쓸쓸한 초상(肖像)과 대구 3위의 중견건설사 태왕이앤씨의 위기는 복합적 요인이 있겠지만, 대구와 지방 경제가 직면한 한계를 드러낸 것 같아 더 아프다. 두 기업이 보내는 경고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할 때다.
윤정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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