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릭 피슬(Eric Fischl, 1948-)은 현대인의 풍요로운 삶 속에 도사리고
있는 다양한 병리현상을 사실주의 기법으로 예리하게 드러낸 포스트모던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뉴욕에서 태어난 그는 1968년 애리조나 주립대학에서 그림을 시작해 72
년 캘리포니아 미술대학을 졸업하며 본격적인 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초기
에는 주로 추상회화를 제작하던 피슬이 1976년을 기점으로 급속하게 형상
성을 띠기 시작하다 서술적인 구상회화로 완전 선회한 데는 독일화가 베크
만(Max Beckmann, 1888-1950)의 영향이 컸다. 에릭은 뉴욕근대미술관에서
베크만의 세폭으로 된 그림 '출발'을 본 후 회화내용을 일회적인 것으로만
제한시키지 않고, 인간의 육체에 기댄 독특한 서술적 구도를 정립했다.
화면을 압도하는 피슬의 거대한 육체풍경들은 알코올중독, 관음증, 동성
애, 근친상간, 자위행위 등 다양한 사회문제를 노골적으로, 때로는 은유적
으로 드러낸다. 이러한 그의 회화는 실제 존재하는 장면을 재현한 것이 아
니란 점에서 사회적 사실주의 전통과는 구별된다.
피슬은 마치 영화감독이나 연출자와 같이 광선 조작 및 인물배치까지 치
밀하게 계산된 새로운 현실을 보여준다. 그의 회화가 추구하는 본격적인
의도는 육체뿐 아니라 심리적으로도 벌거벗은 상태인 현대인의 성을 통한
고독한 자아발견과 자기투영에 있다. 피슬이 추구하는 육체는 단순한 나체
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현실을 드러내는 수단에 다름아니었다.
사춘기 소년의 성에 기댄 에로틱한 장면이나, 사회비판적 주제가 내재된
해변, 강가, 수영장, 욕실, 실내 등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사랑과 화합의
감정보다 죽음, 파괴, 공격성 같은 징후가 더 강하다. 그것은 피슬 회화의
격렬한 본질이 내재된 음울함의 끝에 오늘날 우리시대가 처한 모순과 갈등
구조가 버티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영철<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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