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신라를 공격하는 낙랑(樂浪)에 관한 기사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 기록들은 지금껏 많은 의문을 던져주었다. 한사군의 하
나인 북방의 낙랑이 남방의 신라와 싸운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
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신라본기’ 시조 혁거세왕 30년(BC 28년), 2대 남해
왕 1년(BC 4년), 3대 유리왕 13년(AD 36년)조에 잇따라 등장하는 낙랑은
이치에 맞든 맞지 않든 신라와 관계가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혁거세왕 때의 ‘낙랑인(樂浪人)’들은 “신라가 도(道) 있는 나라”라는
사실을 알고 부끄러워 그냥 돌아갔고, 남해왕 때에도 시조의 국상(國喪)
중에 금성을 여러 겹 에워싼 ‘낙랑군사〔樂浪兵〕’는 그냥 돌아갔다. 그러
나 유리왕 때의 낙랑은 북쪽 변경을 침범해 타산성(朶山城)을 함락시킨다.
지금껏 이 세 기록에 대해서는 김부식이 잘못 본 것이라거나 해석을
달리해야 한다는 견해가 주를 이뤄왔다. 중국의 상인들이 교역을 위해 배를
타고 신라에 왔다가 충돌을 일으킨 것으로 보거나 남쪽으로 이동 중이던
신라세력이 한반도 중부까지 왔을 때 충돌을 일으킨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이런 불신의 배경에는 ‘신라본기’에 기록된 낙랑이 한사군의 낙랑군(樂
浪郡)이라는 고정관념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신라본기’에 등장하는 낙랑을
자세히 살펴보면 현재까지의 고정관념과는 전혀 다른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고구려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비극적 로맨스를 자세히 살펴
보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大武神王) 15년(서기 32년)조의 이야
기이다.
“왕자 호동(好童)이 옥저 지방을 유람하고 있었는데, 마침 낙랑왕(樂浪
王) 최리(崔理)가 그곳에 출행(出行)하여 그를 보고, ‘그대의 얼굴을 보니
보통사람이 아닌데, 혹시 북국(北國: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이 아닌가’라
고 묻고는, 마침내 그를 데리고 돌아와 사위로 삼았다. 그 후 고구려로
돌아온 호동은 최씨녀(崔氏女:낙랑공주)에게 사람을 보내 낙랑의 자명고(自鳴
鼓)를 부숴야 정식 아내로 맞이하겠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낙랑공주는 이에
응해 자명고를 찢었다.”
바로 그해(서기 32년) 고구려는 낙랑을 공격해 멸망시킨다. 그런데 ‘신
라본기- 유리이사금조’는 낙랑 멸망이 그 5년 후인 서기 37년이라고 달리
기록하고 있다.
“유리 이사금 14년(서기 37년) 고구려왕 무휼(대무신왕)이 낙랑을 쳐서
없애고 항복한 그 나라 사람 5천명을 6부에 나누어 살게 했다”는 기록이
바로 그것이다.
김부식은 ‘고구려본기- 대무신왕조’에서 낙랑의 멸망을 설명하면서 “혹
자는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망시키기 위해 혼인하기를 청해서 그의 딸을
데려다가 며느리로 삼은 다음 본국(本國:낙랑)에 돌려보내어 그 병기(자명
고)를 파괴하게 했다’고 말한다”고 적고 있다. 이는 김부식이 가지고 있
던 다른 자료에는 낙랑의 멸망이 서기 32년보다 몇 년 뒤로 기록되어 있
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 14년(313)조는 “겨울 10월에 낙
랑군을 침공해 남녀 2천여명을 사로잡았다”는 기록이 나온다.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때 낙랑군이 멸망한 것으로 보고 있는데, 그렇다면
300여년 전 대무신왕에게 멸망한 낙랑과 미천왕에게 멸망한 낙랑은 같은
세력일 수 없다.
이 의문은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낙랑이 둘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풀릴
수 있다. 하나는 낙랑‘군(郡)’이고, 다른 하나는 낙랑‘국(國)’이다.
낙랑군은 중국의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BC 108년 고조선을 멸망시킨
후 설치한 한사군(漢四郡)의 하나이자 그 중심지였다.
그동안 일제 식민사학의 영향으로 이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지역에 있었
던 것으로 인식해왔으며, 낙랑군은 대동강 유역에 있는 것으로 여겨져 왔다
. 그러나 최근에는 낙랑군을 포함한 한사군이 한반도가 아니라 만주 요동지
역에 있었다는 견해가 대두되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처럼 낙랑군이 한반도가 아니라 요동지역에 있었다면 낙랑군이 신라를
공격하는 것은 더욱 불가능해진다.
이는 신라를 공격했던 정치세력이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이었음
을 말해준다. 위의 기록에서 최리는 낙랑군의 태수(太守)가 아니라 낙랑의
‘왕’으로 나온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대무신왕조’에는 호동이 낙랑공주에게 “너희 나라
무기고에 들어가〔入而國武庫〕북과 나팔을 …”이라고 말하는 기록이 나오
는데 이 기록 또한 ‘군(郡)’이 아니라 ‘국(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미천왕 14년(서기 313년)에 고구려에게 멸망한 낙랑군과는 분명히
다른 정치세력임을 말해준다. 낙랑국은 최소한 BC 28년 이전에 건국되어 서
기 32년이나 37년까지 존속한 국가이다. 낙랑국왕 최리가 고구려를 북국(北
國)이라고 부른 사실은 낙랑국이 고구려의 남쪽에 있었음을 뜻하는데, 그
위치는 고구려 남쪽과 신라 북쪽 중에서, 즉 대동강 유역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대동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수많은 한나라 유물들에 대
한 해석문제가 제기된다. 이 지역에서 한나라 유물들이 출토된다면 이는 고
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지역에 설치한 한사군 중 하나, 즉 낙랑군이라는 결
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같은 모순도 해결해주는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
왕 27년(서기 44년)조의 “가을 9월에 후한(後漢) 광무제(光武帝)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 낙랑을 치고 그 지역을 탈취해 군현을 만드니 살수 이
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는 기록이다.
현재 청천강 이남 대동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한나라 유적·유물들은 한
사군을 설치했던 전한(前漢)이 아니라 후한이 이 지역을 일시 점령했던 때
의 유적·유물인 것이다. 연대를 확인할 수 있는 유물 가운데 고조선을 멸
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전한(前漢:BC 206년∼AD 24년) 때의 것은 없고,
후한 광무제가 이 지역을 정복한 이후의 유물들인 후한(後漢:AD 25∼219년)
때의 것만 출토되는 것은 이 지역이 전한 때 설치된 한사군 지역이 아
니라 후한 때 광무제에 의해 일시 정복되었던 지역임을 뜻한다.
출토 유물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1920년대 조선총독부에서 발
굴한 대동강 유역의 제1호 고분(古墳)에서 출토된 화천(貨泉)인데, 화천은
왕망(王莽) 때에 주조된 청동제 화폐이다. 왕망은 서기 8년 전한을 멸망시
키고 신(新)을 건국해 황제가 되었다가 15년 만인 서기 23년에 망하고 말
았다.
화천이 한반도에 유입되어 통용되다가 무덤에 들어가기까지의 시간을 고
려하면, 전한의 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한 BC 108년 무
렵의 일이라기보다는 후한 광무제가 이 지역을 점령한 서기 44년 이후의
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는 옛 고조선 지역에 설치되었던 한사군의 낙랑군은 대동강 유역이
아니라 요동지역에 있었음을 뜻하는데, 바로 이 정치세력이 서기 313년까지
존속하다가 고구려에 멸망하는 것이다.
이 시기에 있어 후한 광무제의 낙랑 공격 기사의 올바른 해석 여부가
관건이다. 고구려에게 멸망한 최리의 낙랑국 유민들이 멸망 10여년 뒤인
서기 2년 무렵 후한의 힘을 빌려 부흥을 꾀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후
한으로서는 동쪽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던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
해 고구려의 남쪽에 낙랑국이란 우방을 부활시킬 필요가 있었기에 광무제의
대동강 유역 공격이 있게 된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런데 후한의 도움으로 재건된 낙랑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기림이사금
조’에 따르면 즉위 3년(서기 300년)에 대방(帶方)과 함께 신라에 자진해서
투항한다. 이는 낙랑국이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대동강 유역을 빼앗기고
남하한 것을 뜻한다. 이때도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으로 표현되는 것으로
봐서 이 낙랑 역시 후한 광무제의 정벌 이후로도 후한의 군현이라기보다는
예전처럼 독자적인 나라로 존재하였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건국 초의 신라를 공격했던 정치세력은 낙랑군이 아니라 우리 역사
속에 존재했던 낙랑국이라는 별개의 정치세력이었다.
/이덕일<역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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