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기자의 푸드블로그] 종로 대구 요정 골목을 찾아서

  • 입력 2008-02-15   |  발행일 2008-02-15 제37면   |  수정 2008-02-15
"아, 옛날이여∼" 사라진 선거특수에 한숨쉬는 식당가
[이춘호기자의 푸드블로그] 종로 대구 요정 골목을 찾아서
1960∼80년대 전성기를 누린 종로의 한 요정 골목, 지금은 선거특수가 사라져서 그런지 더없이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식당가 선거특수?

이젠 기대 못합니다. 세상 참 많이 변했죠. 농촌은 몰라도 이제 도심에선 뭘 바라는 유권자도 주려는 후보도 거의 사라진 것 같습니다. 1990년대 이맘 때만 해도 '요정형 한식당'은 예비후보들의 '선거 캠프'로 전락했습니다. 그때는 후보자가 지지자에게 밥과 술 정도 사는 건 '관행'으로 치부됐습니다. 그런데 2000년 16대 총선 때 발족된 부정선거 감시단이 식당가에 들이닥치면서부터 사정은 달라집니다. 후보들의 식당 출입에 급제동이 걸립니다. 지금은 연중무휴 감시합니다. 포상금을 노린 파파라치 등으로 인해 회식을 가장한 얼굴 알리기가 맥을 못추고 있습니다. 선관위도 대충 봐주지 않죠. 직원들도 한건 하기 위해 눈을 부라리고 있습니다.

요즘 예비후보들은 생고기·막곱창·호프집 등 서민적인 식당을 선호합니다. 특히 부담없는 '구이집'이 뜨고 있습니다. 모르긴 해도 지난해 말 대선을 앞두고 KBS 일요스페셜이 전격적으로 서울의 한 막창집에서 촬영한 '허심탄회 막창토크'의 반향일 겁니다. 이제 후보도 약아서 고급 한식당·유흥주점 같은 데를 좀처럼 얼씬거리지 않습니다. 대신 두산동 두산1번지, 어린이회관 근처의 미가락, 들안길 너구리, 송학, 극동, 녹양 등과 같은 생고기집, 남구 안지랑시장 곱창 골목, 수성못 근처 상동 막창, 칠성시장의 보리밥집, 서문시장의 칼국수 거리 등을 기웃거립니다.

# 아직 가야금 소리 내는 종로 요정 가미에 가보니

87년 태동한 (사)한국유흥음식업중앙회 대구지회에 전화를 걸었습니다.

유흥업소 현황을 알아봤습니다. 현재 대구에는 1천355개의 유흥주점, 단란주점은 381개소가 있습니다. 지역 음식점 수는 1월 현재 2만6천446개 업소.

그런데 지회에서 아주 흥미로운 정보를 알려줬습니다. 가야금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요정이 한 곳 있다고 했습니다.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현재 지역에선 요정으로 신고된 곳은 춘앵각과 가미 두 곳뿐입니다. 물론 기생이 머물던 그 시절 요정은 아니죠. 애써 요정 분위기를 내려고 하는 데가 가미라고 호평하더군요. 저는 대충 구색갖추기로 국악을 선보이겠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갑자기 종로 요정 골목의 현주소가 궁금해 가미 쪽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이 골목에서 잘나가는 건 '가로등' 뿐입니다. 골목은 '암선고를 받은 환자' 같습니다. 종로 금고골목 초입 왼쪽 구불구불한 골목 안으로 들어가니 가미가 보였습니다. 세 채의 한옥을 한 덩어리로 묶은 구조입니다. 마당은 좁았지만 오른쪽 벽 전면에 대형 연꽃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18세에 요정에 들어와 산전수전 다 겪은 뒤 '대구의 마지막 요정 사장'으로 불리는 윤금식씨(52). 자그마한 체격이지만 자태가 단아해 전혀 이런 곳에 어울리지 않는 인물로 보였습니다. 그가 자기 얘기를 하기 전 10여년 공들여 꾸며놓은 예사롭지 않은 방을 돌며 일일이 설명해줬습니다.

금강산 만물상 등 북한작가가 그린 초대형 풍경화 3점은 격이 달랐습니다. 큰방 벽 전면을 장식해 꼭 '북한 주석궁'에 들어온 듯한 인상을 줬습니다. 세필 금강경·반야심경으로 그려낸 태극기, 신라종 인간문화재 원광식씨의 신라범종, 고지도인 혼천전도, 농산 스님의 서예 작품, 베틀, 골동품상을 통해 구입한 예사롭지 않은 필체의 현판, 서각 작품 등이 방 규모에 맞는 자리에 잘 세팅돼 있었습니다. 모두 윤씨의 안목입니다. 한 방에 들어가니 벽 한 곳을 감실처럼 치장, 서당 정경을 그린 닥종이 작품을 바닥에 놓고 미니 기와집으로 감싸줬더군요. 꼭 '갤러리형 요정' 같았습니다. 8개월 전부터는 수양을 위해 주역 공부까지 시작했다네요.

'이 사람, 도대체 요정 사장 맞아.'

옆방에서 정갈한 우리 소리가 스며나왔습니다. 판소리 춘향가 중 한 대목에 이어 아리랑·도라지 가야금 병창이 깔리고, 북장단 어우러진 퓨전 민요로 엔딩. 손님들이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꼭 '안방 국악연주회' 같군요.

제가 그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전문 연주인이 이런 공간을 좋아하지 않을텐데요?"

"그래요, 처음엔 제 뜻을 잘 이해 못해 연주한 지 며칠 만에 그만둔 분도 있습니다. 현재 연주자는 제가 국악 애호인이라는 걸 확신하기에 여기서 편하게 연주하는 거라고 믿습니다. 현재 2명의 연주자가 있는데 여기 온 손님들은 좋든 싫든 가미표 가야금 병창을 의무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가미 여종업원은 무조건 개량한복, 마담은 전통한복을 입습니다. 윤씨는 여기 여성들을 '한가족'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의 교양을 위해 한 단골이 기증한 사무엘 울만의 '청춘'이란 서예작품을 액자로 만들어 그들의 대기실에 걸어줬고, 교양도서까지 비치해놓았습니다. 벌써 5년째 단골을 위해 각종 건강 정보와 이곳 여성들의 추억담이 실린 홍보형 잡지까지 발간합니다.

"요정이 어떻게 한정식으로 넘어오게 됐는가요?"

"90년대초 김영삼 정부의 과도한 특별소비세를 피하기 위해 한정식으로 돌파구를 찾은 측면도 있고 그보다 앞서 전두환 대통령 시절 고위공직자 요정 출입 금지령이 내려지면서 사실상 요정 호시절도 붕괴되기 시작한 거라고 봅니다."

그는 그만의 '가미문화'를 만들고 갈구하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는 선거특수를 전혀 못 느낍니다. 어렵지만 사라진 요정문화를 다시 복원하고 싶습니다. 우리 소리를 고집하는 건 상술 때문만은 아닙니다. 이렇게 큰 도시에 외국인을 위한 한국형 술집 한 곳 정도는 있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 대구 요정가 현주소

70년대초만 해도 대구 종로에만 무려 30~40개의 요정이 포진해 있었습니다. 80년대 들면서 삼덕2가 경북대 병원 뒤편 주택가로 요정거리가 이동합니다. 90년대 들어선 태금, 가락 등이 수성구 시대를 열었지만 모두 문닫고 맙니다. 청수원의 명맥을 이은 건 중구 상서동 춘앵각과 계산동 일심관 정도입니다. 80년 중구내 18개 요정 업소 여사장을 불러 '길우회'까지 결성했던 지역 요정계의 대모 나순경씨. 일흔 후반의 그녀는 몸이 안좋아 2003년말 일선에서 물러나 팔공 보성아파트에서 치료하면서 조용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나씨 뒤를 김은정씨가 이었습니다. 일심관은 90년대 중반 한정식 전문 '풍림식당'이 됐다가 97년 6월 파산, 건물 일부가 일식당 사가이 본점 측에 팔려버립니다.

참고로 종로 요정 골목의 '3인방 윤씨'를 알아둘 필요가 있겠네요. 81년 9월 오픈한 석빈(夕賓)의 윤행숙, 85년 태어난 백록(白鹿)의 윤동희씨, 86년 6월 개업한 가미(加味)의 윤금식씨입니다. 81년 문을 연 석빈은 5년전 한식당으로, 평화 클러치 창업주인 진골목 안 고 김상영 회장 자택을 매입한 백록은 4년전 폐업합니다. 현재는 일반식당 백록이 돼버렸습니다.

80년대초 삼덕동에 당시 대구에서 가장 규모가 큰 요정형 한정식당 '심전방'이 들어섭니다. 심전방 붐으로 인해 삼덕동에 20여개 비슷한 업소가 난립하죠. 85년 수성구 그랜드호텔 근처에서 춘앵각 출신 마담 김명희씨가 단추방을 차립니다. 한정식 요정은 거의 몰락하고 2000년대 수성구 '수림' '길조' 등이 매머드 한식당 시대를 엽니다.

[이춘호기자의 푸드블로그] 종로 대구 요정 골목을 찾아서
생고기 전문 두산1번지.
[이춘호기자의 푸드블로그] 종로 대구 요정 골목을 찾아서
아직도 가야금 소리를 들려주는 대구시 중구 종로의 요정 가미의 한 방 내부와 윤금식 사장의 옆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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