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1] '왕의 나라’ (2) 人橋를 밟고 안어대동의 땅으로

  • 입력 2011-03-30   |  발행일 2011-03-30 제7면   |  수정 2021-05-29 18:55
[스토리텔링 '왕의 나라' ]제작 풀스토리
20110330

#3. 뒤는 적이요, 앞은 강이라니!


공민왕의 몽진(蒙塵)길은 초라하고 험난했다. 왕은커녕 왕후마저 연(輦·가마)을 버리고 말을 타야 했다. 경기도 광주에서는 성민(城民) 없이 관리 몇이 왕을 맞이했고, 충청도 충주에 도착했을 때는 맞이하는 관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전황이 급박했음이리라.

주흘산을 넘고 예천을 거쳐, 풍산 수리에 이르러 잠시 어가를 멈추었다. 마을 주민들이 나와서 왕의 행렬을 반기며 극진히 대접했다. 달포 만의 환대에 일시 마음의 안정을 얻은 왕은 홍언박으로부터 복주와 관련된 역사를 들었다.

“참으로 선대 왕들께서 평안하고 복된 땅이라 하신 까닭을 알만하오. 그렇지만 과연 복주라고, 지금 저들 10만 대군에 대항할 기틀을 만들 수 있겠소?"

“뜻이 강건하면 무엇이든 이룰 수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또한 그 곳에서는 일찍부터 저와 교우하던 몇 사람이 언제든지 나라를 위해 나설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왕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여전히 수심 가득한 용안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몽진을 나설 때 시위하던 군사들도 이제는 겨우 십수명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모두 추적하는 홍건적과의 전투에서 죽거나 다쳐 낙오된 것이었다.



진퇴유곡. 이게 고려의 운명이란 말인가!

저 강만 건너면 복주인데, 안동인데! 안어대동의 땅을

코 앞에두고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이 것이

운명이라면, 정녕 이제 고려는 끝이었다.

“안어대동의 부녀자들이여, 왕후마마와 비빈마마들이 계시다!

먼저 다리를 놓아 강을 건너게 하라!

왕후마마의 다리를 놓자! 우리의 왕을 모시자!"


“나를 쫓던 홍건적은 지금 어디쯤에 있소?"

“산과 재가 높아 아직은 넘지 못한 듯합니다."

“시위하던 군사들도 이제는 거의 보이지 않는구려."

왕의 낙담에 홍언박은 차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적은 언제 재를 넘을지 모르는데, 이래서는 복주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을 듯하구려."

“심려치 마십시오. 남은 군사 중 몇을 앞에 보내 적을 막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하오?"

왕의 하문에 미처 대답도 꺼내기 전에 시위 군사의 화급한 전갈이 들이닥쳤다.

“큰일 났사옵니다! 홍건적이 재를 넘어 벌써 예천을 지났다는 전갈입니다!"

예천이라면 바로 얼마 전에 지나온 곳이었다. 그새 해는 저물어 어둑해지는데, 일각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허둥지둥 자리를 일어선 어가 행렬은 어둠이 내리기 전 복주에 이를 생각에 말을 내달렸다. 그래도 왕후인 노국공주는 대륙에서 말을 탔던 터라 나았지만, 다른 비빈들은 말을 타는 것도 처음인데 말마저 비루먹어 그 처량한 행색이 보는 이의 눈시울을 절로 젖게 했다.

어느새 홍건적 추적군의 말발굽이 일으키는 먼지가 등 뒤에서 뿌옇게 일고 있었다. 홍언박은 앞서 보낸 군사들을 애타게 찾으며 행렬을 호위했다.

“왕이시여, 저희가 여기서 적을 막을 테니 어서 가십시오!"

보이지 않던 시위 군사 몇이 모습을 드러내며 허리를 굽혔다. 왕이 그제야 사위(四圍)를 돌아보니, 짚단으로 만든 병사들이 창검을 높이 세워 진을 펼친 형세가 제법 그럴 듯했다. 홍언박이 말하던 준비라던 것이 이 것인 모양이었다.

“왕이시여, 복주까지는 무사히 가실 수 있을 겁니다. 어서 서두르소서."

홍언박의 재촉에도 왕은 잠시 말머리를 멈추고 군사를 돌아보았다. 참담함이야 더 말할 수도 없지만, 한편으로는 왕을 위해 기계(奇計)를 짜낸 군사들의 정성에 가슴이 뭉클했다. 하지만 적의 눈을 속이는 계책은 잠시 추적군의 말발굽을 멈추게 할 뿐, 이내 저들의 칼날에 도륙될 터이니……. 왕은 저미는 가슴을 달래며 다시 말고삐를 당겼다.

과연 그랬다. 갑작스레 나타난 정연한 군세에 추적군의 말발굽은 주춤했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전열을 정비하고 공격을 개시해 왔다. 불과 십여 기의 군사에 수백의 적이라니……! 칼이 부딪치고 피가 튀니 중과부적을 뒤집을 수는 없었다. 적의 피인지 자신의 피인지, 구천의 악귀처럼 검붉은 피칠을 한 시위 군사 몇이 겨우 몸을 추슬러 왕의 뒤를 쫓았다.

어느새 어둠은 세상을 뒤덮었고, 어가는 걸음을 또 멈춰야 했다. 뿌옇게 피어오르는 안개 속에 들려오는 것은 거친 물소리뿐. 송야천이었다.

“아, 이 강을 어찌 건너느냐……."

왕이 낙담하며 주위를 돌아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지치고 나약한 비빈 시종들. 저들이 어찌 깊이도 알 수 없는 한밤중의 강을 건넌단 말인가. 게다가 동짓달 추위에 때 아닌 안개까지 자욱하니, 어찌할꼬!

왕의 탄식 앞에서 홍언박은 아무런 말을 꺼내지 못했다. 진퇴유곡. 이게 고려의 운명이란 말인가! 저 강만 건너면 복주인데, 안동인데! 안어대동의 땅을 코 앞에 두고 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이 것이 운명이라면, 정녕 이제 고려는 끝이었다.

“적이다!"

불화살이 날아오자, 말발굽 소리가 지척이었다.

“오냐, 모두 칼을 뽑아라!"

비장한 왕의 외침에 일순 비빈들의 비명소리마저 멎었다. 그러나 시위하는 군사라고는 겨우 열 명 남짓.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래도 홍언박은 끝까지 하늘에 대한 믿음을, 반 천년 고려의 수호신 부처님의 자비를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왕이시여, 여기는 제가 막겠습니다. 어서 말을 달려 강을 건너소서!"

“그럴 수는 없다! 왕후와 비빈을 버리고 혼자 사는 구차함을 겪느니 차라리 내 피를 쏟으리라!"

“아니되옵니다! 바로 지척에 왕의 땅이 있습니다. 옥체를 보존하여 고려를 지키소서!"

왕을 노국공주의 곁으로 밀친 홍언박이 칼을 빼어들고 짓쳐오는 적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그 사이 앞서 쫓아온 시위 군사 몇이 죽을 힘으로 칼을 휘두르며 적의 걸음을 지체시키고 있었다. 하지만 기껏 일각이나 버티려나. 바람 앞의 등불,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와……!"

갑작스레 들려오는 함성에 횃불을 밝힌 한 무리의 사람들. 홍건적보다 더 놀란 것은 왕이었다. 그러나 한 손에는 횃불을 밝혀들고, 다른 한 손에는 칼과 낫을 든 채 적을 향해 달려가는 그들은 매운 겨울바람에도 성긴 삼베 옷차림인 백성, 고려의 백성이었다.

“홍언박, 어디 있는가?"

어둠을 가르는 소리에 홍언박이 달려갔다. 과연 그는 무빈이었으니, 근엄한 얼굴에는 충정의 결기가 가득했다.

“고맙네, 때맞춰 와주었네."

“나도 고려의 백성일세. 저 홍건적 놈들은 내가 물리칠 테니 자네는 어서 어가를 모시게."

“강이 막혀서……."

비빈들을 향한 홍언박의 눈길에 무빈은 비로소 사정을 알아채고 백성의 무리를 향해 소리쳤다.

“안어대동의 부녀자들이여, 왕후마마와 비빈마마들이 계시다! 먼저 다리를 놓아 강을 건너게 하라!"

“왕후마마의 다리를 놓자! 우리의 왕을 모시자!"

일사불란한 합창과 함께 한 무리의 부녀자들은 단박에 강으로 뛰어들어 줄을 짓고 허리를 굽혀 인교(人橋), 사람의 다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무빈이 다시 소리쳤다.

“안어대동의 군사들이여! 여랑을 따라 적을 물리쳐라!"

“나 여랑이 앞장선다! 홍건적을 물리치자!"

“와……!"

카랑한 여인의 선창에 천지가 무너질 듯 함성이 울리자, 하늘의 별빛마저 떨리는 듯했다. 갑옷 차림의 홍건적 군사들도 노도와 같은 그 기세에, 벼린 칼을 들고서도 삼베옷 군중의 낫 앞에서 사지를 후들거렸다.

왕은 눈물을 지었다. 엉성한 삼베 치마저고리 틈새로 동짓달 매운 찬바람이 매섭게 스치건만, 그녀들은 머뭇거림조차 없이 차디찬 강물에 몸을 넣어 다리를 만들었다. 등을 타는 비빈의 발걸음이 지나가면 다시 몸을 일으켜 앞쪽으로 달려가 다리 잇기를 수십 차례……. 이를 기려 '놋다리밟기’라 할 것이니, 나라의 왕 된 자로서 백성의 이 은혜를 어찌 다 갚을 텐가. 아, 정녕코 나라의 주인은 이들 백성이니……!

왕의 어가는 치열한 고함과 비명과 칼부림 소리를 등 뒤로 한 채 안어대동의 땅을 향해 그렇게 송야천을 건넜다.

<계속>


글=김정현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2011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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