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양반 밥상

  • 입력 2011-04-01   |  발행일 2011-04-01 제42면   |  수정 2011-04-01
조선시대 양반은 식사할 때 맨먼저 무엇부터 떠먹었을까?…정답은 '지렁'
"床前無言" 밥상 앞에선 절대 소리 내면 안돼
밥은 오른쪽 방향으로 뜨고 조금 남겨야 미덕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양반 밥상
조선 때 임금이 드셨던 수라상.

◆ 반가음식의 원류가 된 김장생의 가례집람

반가(班家)는 예(禮)에서 시작해 예로 끝난 삶을 살았다.

'접빈객 봉제사(接賓客 奉祭祀)' 가 삶의 화두였다. 그들의 행신범절에 대한 치밀한 매뉴얼 북까지 개발된다. 그중 하나가 주자가례(朱子家禮). 그것이 조선에 들어와 현실에 맞게 고쳐졌는데 대표적인 게 1599년(선조 32) 사계 김장생이 펴낸 '가례집람(家禮輯覽)'이다. 권10에 제례음식 진설법이 잘 정리돼 있다. 홍동백서(紅東白西), 좌포우혜(左脯右醯), 어동육서(魚東肉西) 등등.

지방 명문 사대부의 동선은 거의 서울과 닿아 있었다. 그들 음식은 임금을 위한 수라상 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수라상 진설법은 흡사 '미적분 방정식' 해법 찾기를 방불케 한다. 나주에서 올라온 나주반에 차린 12첩 반상을 놓는 위치도 정해져 있다. 반드시 왕과 왕비가 같은 온돌방에서 받고, 동편에는 왕, 서편에 왕비가 좌정한다. 겸상은 없고 시중드는 수라 상궁도 각각 3명씩 대령하고, 수라상도 원반·곁반·책상반 등 3개가 들어왔다. 1719년부터 1910년까지 임금이 먹을 수 있는 국의 종류만 64가지.

진찬의궤에 상세하게 그 매뉴얼이 적혀 있는 궁중음식이 어떻게 반가음식에 스며들어갔을까.

그 흐름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봉송(封送)'문화다. 이건 임금이 음식을 다들고 '퇴선(退膳)'하고 나면 여러 신하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 것이다. 반가음식이 궁중음식을 닮은 것도 이같은 이유다. 하지만 궁중음식은 일반 음식과 차별을 뒀다. 양반이라도 차릴 수 있는 상을 9첩 이하로 제한하고 12첩 반상은 궁중에서만 가능했다. 하지만 전통음식 연구가 김상보 교수(대전보건대 전통요리과)는 "임금의 상은 궁중연회상과 달리 늘 소박함을 유지했으며 12첩상 반상은 한말의 예외적인 경우"라고 주장한다.

◆ 반가음식은 결코 풍성하지도 호화롭지도 않았다

우리가 반가음식과 관련해 착각하는 대목이 있다. 춘향전에 등장하는 '변사또 밥상'과 비슷할 거라고 믿는 것이다. 그건 절대 아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마인드가 출중한 꼬장한 선비들, 그들은 자신의 입으로 음식의 맛을 논하는 것 자체를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음식을 탐하는 이와는 허교도 하지 않았다. 상당수 양반들은 3첩 반상, 국과 밥·김치와 된장·나물 한 점 정도만 있어도 맛있게 먹었다. 특히 호남과 달리 경상도 지방은 물산이 그렇게 풍부하지 못했다. 그래서 잔칫날이나 명절 등 때만 쌀밥과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하지만 제사만은 풍성하게 치장했다. 자기는 굶어도 조상 제사 음식은 정성을 다해 챙겼던 것이다.

◆ 양상수척(讓床瘦瘠)

예로부터 '양반은 대추 하나만 있어도 충분히 요기한다'고 했다.

항상 신독하고 겸손하고, 남을 배려하는 걸 미덕으로 삼았던 선비. 그들은 다른 식구들을 의식하면서 밥을 들었다. 맛있는 걸 맛있게 먹지 않고 가능한 수하가 많이 먹을 수 있도록 '밥상물림'을 한다. 양반가 식문화의 가장 독특한 점이 바로 밥상물림이고 그걸 존수하다보면 몸이 많이 축나게 된다. 이걸 '양상수척(讓床瘦瘠)'이라 해서 덕의 상징으로 여겼다. 안동 등 경북 북부지방 양반가에선 어른이 밥을 남기는 걸 '체면한다'고 했다. 자연 종부는 주발에 넉넉하게 남을 정도의 고봉밥을 퍼 담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문중도 있다. 도산면 퇴계 종가에서는 먹을 만큼 만 밥을 담는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워낙 접빈객이 많아서 가계도 축나고 해서 밥을 적게 담은 것이다.

◆ 지엄한 밥상법도

양반은 밥상에서도 지엄하다.

'상전무언(床前無言)', 양반은 밥을 먹을 때 절대 소리를 내면 안됐다. 또한 식사할 때 처음부터 밥을 떠먹어도 흉이 됐다. 식사 순서는 먼저 정좌한 뒤 삼고례(三告禮)를 올린다. 젓가락으로 밥상을 세 번 두드린다. 이것은 천지인(天地人)에게 예를 올리는 것이다. 이때 '인'은 개인이 아니라 조상과 종묘사직을 의미한다. 이후 종지에 담긴 지렁(조선간장)부터 조금 떠먹고 동치미 국물을 먹은 뒤 밥을 떴다. 이러면 혀의 미뢰가 초롱하게 눈을 뜬다. 혀가 중립기어에 놓여야 식감을 느낄 수 있다.

밥 떠먹는 방향도 정해졌다. 통상 왼쪽에서 오른쪽, 7시 방향에서 1시 방향으로 이동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지구 자전축 각도와 비슷하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45도 각도로 가지런하게 퍼내려간다. 요즘과 달리 예전에는 밥을 남기는 게 미덕이다. 옛 어른들은 오른쪽 모서리에 밥을 조금 남겼는데 그 모양이 꼭 초승달 같아 '초승밥'이라 부른다. 상가에서 황천에서 오는 저승사자를 위해 마련한 '사잣밥'과 비슷하달까. 그건 아랫사람을 위한 각별한 정(情)이었다. 또 식전 반주도 곁들이는데 보통 석 잔을 넘지 않는다.

양반들은 된장 국물이나 김치 등을 밥 위에 올려놓고 먹지 않는다. 밥이 더렵혀지는 걸 경망스럽게 본 것이다. 국에 밥을 말아먹지도 않고, 된장과 나물을 넣고 비벼먹는다거나 밥에 국을 말아 비벼먹지도 않는다.

밥상은 늘 독상이었다.

여성은 어른과 함께 식사를 하지 못했다. 일단 어른이 먼저 수저를 들면 그때서야 수하도 음식을 먹을 수 있었다. 어른이 아직 식사를 마치지 못하면 아랫사람은 수저를 놓고 기다려야 했다. 양반은 절대 점심 때 남의 집을 방문하지 않았다. 너나없이 가난하던 때였기 때문이다. 일찍 와도 때가 되면 먼저 자리를 뜨는 게 예의였다. 붙잡는다고 해서 바로 식사에 응해서도 안 된다. 또 종부는 명령만 내리지 절대 부엌 출입도 않는다. 그래서 한복 윗저고리 옷 끝단에 흰 덧천을 댄다. 신분의 상징인 것이다. 상을 나르는 건 남자 노비들의 몫이었다. 장에 가서 제수 마련해 오는 것은 남자의 몫이었다.


#퇴계 불천제위 상, 적(炙)은 날것 올리고 탕은 다섯 가지…간고등어는 안 써

제사 중에서도 차사(茶祀)보다 기제사(忌祭祀)가 중시됐고, 기제사보다 국불천위(國不遷位) 제사를 더 중시했다.

불천위란 나라나 지역 향교에서 망자의 덕망을 기리기 위해 사당에서 영구히 제사를 봉행하는 것이다. 국내에서 불천위 제사음식에 대한 권위자는 윤숙경 안동대 식품영양학과 명예교수다.

그럼, 퇴계 이황의 불천제위 음식을 엿보자. 적(炙)은 '군자혈식(君子血食)'이라 해서 모두 날 것으로 올린다. 탕도 기제사에는 통상 세가지만 올려도 되지만 여기선 다섯가지, 즉 쇠고기·명태·전복·조개·상어 등이다. 적으로는 닭고기, 쇠고기, 쇠머리, 소 껍질 수육, 문어, 청어, 홍어, 상어, 방어 등이 들어가지만 안동의 명물 안동 간고등어는 올리지 않았다. 탕과 적에는 '우모린(羽毛鱗)'이란 룰이 적용된다. 깃이 달린 닭, 털이 있는 고기, 비늘이 있는 생선을 포함시켜야 한다. 적을 괼 때 생선 류는 밑에 , 고기류는 그 다음, 맨 위에는 닭을 괸다. 채는 고사리, 시금치, 토란, 도라지, 무, 박나물 등 제철채소면 되고 전부 한 그릇에 담아야 한다. 퇴계는 유언을 통해 만들기 번거로운 유과와 약과 같은 사치스러운 음식은 올리지 말라고 했다. 김치는 백김치, 건포는 대구포, 술의 경우 예전에는 청주를 담갔는데 이젠 정종으로 대신한다.

[이춘호 기자의 푸드 블로그] 양반 밥상
고춧가루가 들어가지 않는 경상도 스타일의 비빔밥으로 불리는 안동 헛제삿밥. 오른쪽 하단은 안동식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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