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1] '왕의 나라’ (5) 복주군의 출전과 왕의 눈물

  • 입력 2011-04-20   |  발행일 2011-04-20 제6면   |  수정 2021-05-29 19:00
20110420
연필 일러스트=김성태 화백

 조일신의 칼날이 왕을 향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여랑도 몸을 날려 칼날을  막아서니 그녀의 복부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바닥을 기어서 다가오는 여랑을  홍언박도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헐떡였다.


“여, 여량아. 미, 미안하구나…"
“괜, 괜찮습니다. 이렇게라도 님을 따라 함께 가게 되었으니 저는 행복합니다. 이제 다시는 서로 떨어져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래. 이승에서 못 누린 영화, 우리 저승에서 다정(多情)으로 대신하자꾸나."


“왕이시여, 끝까지 보필하지 못함을 용서하소서."
“무슨 소립니까. 제가 형님과 이 여랑에게 목숨을 빚진 게 얼마인데, 아! 하늘이시여…!"
“부디, 부디, 고려를 핍박받지 않는 자주국으로 만드소서…."
“오! 선왕들이시여, 부처님이시여. 이들의 영혼을  보살펴주소서…."


# 6. 오, 내 사랑이여!

마침내 출전이다! 왕이 드디어 무빈이 이끄는 복주군의 출전을 명했다. 국경 일원은 물론이고 내륙 일부지역까지 진출했던 홍건적은 그간 전열을 재정비한 고려군의 반격으로 이제 개경과 국경 일부 지역에서만 준동하고 있었는데 마지막 토멸 작전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출전의 보고를 위해 왕 앞에 도열한 복주군의 군세는 자못 엄중했다. 왕은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출전을 격려하고, 장수 무빈에게 친히 어검(御劍)을 하사했다. 군사의 함성은 하늘을 찌를 듯했고 왕과 백성의 가슴은 터질 듯 벅찼다.


“이제 때가 다가오고 있으니 자네의 무훈을 믿어 의심치 않고 기다리겠네. 개경을 수복하면 그곳에서 만나세."

“나 개인의 무훈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고려가 자주국이 되면 술이나 한잔 나누면 될 일. 그런데 개경에서 만날 때는 여랑도 함께 볼 수 있겠지?"

“이제는 그럴 수밖에 없지 않은가. 여랑은 왕의 호위무사니 당연히 개경으로 갈 테고. 모르지, 혹시 내가 파직 당해 복주에서 여랑의 귀향을 기다리면 소홀했던 지난날의 벌을 받게 될지. 하하하!"

“예끼, 이 사람! 하하! 이제 여랑은 왕과 더불어 님도 지켜야겠구나. 개경에서는 너를 선머슴 같은 모습 말고, 고운 여인으로 만나고 싶구나."

“장군께서는 어찌 저를 선머슴이라 하십니까…."

“어이구, 이제는 얼굴도 붉히고. 벌써 여인이 다 되었구먼 그래, 하하하!"

얼굴을 붉힌 여랑을 두고 홍언박, 무빈 두 남자는 짓궂은 너털웃음을 한참동안 더 이었다. 인연이 있어 만나, 그 인연을 소중하게 이어온 사람들이 이제 더 깊은 정의 날을 앞두고 있는 것이었다. 


궁 한 곳에서는 김용과 조일신이 은밀한 밀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은 친원파의 거두들로 몽진 이후에는 원나라와의 연락도 닿지 않아 노심초사하는 중이었다.

“홍건군이 패퇴하고 있음이 분명한 듯하오. 이제 개경을 수복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니 참으로 걱정이오."

“그렇소. 더구나 복주군을 얻어 군세를 보강한 왕은 개경으로 돌아가면 분명 우리를 압박할 것이오. 듣기로는 손홍량이 올린 수습책의 주된 내용도 우리 친원 세력을 몰아내고 개혁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는 것이라 하오."

“나도 들어 알고 있소. 문제는 노국공주, 그 계집이오. 왕은 노국공주의 말이라면 거절하지 못할 텐데, 어쩌자고 부모와 본국을 외면한 채 독배를 마시려하는 것인지, 원!"

“둘 다 사랑에 눈이 먼 것이지요."

“사랑? 흥, 그까짓 사랑이 다 무어란 말이오. 힘이 있고, 돈이 있으면 사랑 따위는 저절로 찾아오는 하찮은 것이거늘."

“아무튼 어찌할 생각이시오? 날을 잡아야 되지 않겠소?"

“승전보가 들어오기 전에 끝을 봐야지요. 이미 왕이 바뀐 뒤라면 그 누군들 어찌하겠소. 어차피 승전의 과실은 누가 되든 왕의 것이니."



“반란이다! 역모다!"

왕이 왕후와 함께 홍언박을 대하고 있을 때 김용과 조일신 일당이 수십의 군사를 이끌고 내궁으로 쳐들어왔다. 이미 내궁 밖의 군사는 은밀한 공격에 목숨을 잃은 터였고, 당장 남은 호위군은 여랑과 대여섯의 군사뿐이었다. 여랑이 남은 군사들과 혼전을 펼치는 그 사이, 김용과 조일신은 벌써 왕 앞에 피 묻은 칼을 들고 섰다.

“왕께서는 어찌 은혜를 배신으로 갚으려 하시오! 선대로부터 우리가 원나라를 상국으로 모시고 그 그늘 아래에서 누린 영화가 백년이 넘는 터요!"

“네 이놈! 어찌 감히 네 놈이 선왕들을 들먹이는 것이냐! 나라의 힘이 약해 갖은 수모를 당하면서도 오늘까지 견디어 온 것은 오직 힘을 키워 나라의 주권을 바로 세우려 함이었다. 그 절치부심의 세월에 너희 놈들은 상국이라는 이름으로 원국을 등에 업고 호가호위, 왕을 협박하며 영화를 누리지 않았더냐! 그런데 이제 내가 나라의 자존을 찾으려하니 기어이 그 승냥이 근성을 드러내는구나!"

“나라의 자존이라고! 하하, 그까짓 하찮은 자존 때문에 목숨을 잃어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에잇!"

높이 치켜드는 칼 앞에 왕후가 뛰어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오! 그대들은 고려의 신하, 어찌 고려의 왕 앞에 칼날을 세우는 것이오!"

“공주! 이 모든 것이 공주의 탓이오! 공주야말로 어찌 황제폐하를 능멸하는 것이오! 공주가 일개 위왕의 딸로서 고려의 왕비가 된 것은 황제폐하의 은덕 아니오. 그런데 자식의 도리도, 폐하에 대한 은혜도 모두 외면하고 오직 사랑놀음에 빠지다니, 참으로 어리석소!"

“아무리 부모님의 은혜가 있다고 해도 나는 이미 한 지아비의 아내. 지아비가 왕이어서 나 또한 고려의 국모가 된 것이지 황제의 은덕은 아니오. 사랑하는 이의 아내, 한 나라의 국모가 되었으니 그 길을 지키는 것이 바른 도리. 그러나 그대들은 나라의 신하로서 두 마음을 품었으니 도리를 모르는 승냥이가 맞구려."

“뭐라고! 이런 발칙한 계집!"

“네 이놈!"

김용의 칼날이 왕후를 향하자 홍언박은 온몸을 날려 그 칼을 받았다.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를 토해내면서도 홍언박은 가슴에 박힌 칼날을 움켜잡아 왕과 왕후를 지키려했다.

“으윽, 여, 여랑아…!"

단발마의 비명에 문을 박차고 뛰어든 여랑의 낯빛이 하얗게 바랬다.

“오, 오라버니!"

“왕과 왕후마마를…."

벌써 조일신의 칼날이 왕을 향해 허공을 가르고 있었다. 여랑도 몸을 날려 칼날을 막아서니 그녀의 복부에서 붉은 피가 분수처럼 뿜어졌다.

“여, 여량아, 왕을, 왕을…."

홍언박의 가슴을 발길로 걷어차 칼을 빼낸 김용이 다시 칼날을 치켜세웠다. 여랑은 조일신을 밀치고 제 칼을 휘둘러 왕을 향한 김용의 칼날을 막았다. 날카롭게 부딪히는 두 개의 칼날…. 왕이 뒤늦게 검을 찾아들자 조일신이 왕과 겨루려 들었다. 여랑이 몸을 돌려 조일신을 단칼에 베는 사이 김용의 칼날이 그녀의 등에 박혀들었다. 김용이 박힌 칼을 뽑으려하는 사이 왕이 김용의 목에 칼을 꽂았다. 단발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김용의 눈동자가 허옇게 뒤집어졌지만 여랑의 몸뚱이도 낙엽처럼 바닥에 굴렀다.

“오, 오라버니…."

바닥을 기어서 다가오는 여랑을 홍언박도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헐떡였다.

“여, 여량아. 미, 미안하구나…"

“괜, 괜찮습니다. 이렇게라도 님을 따라 함께 가게 되었으니 저는 행복합니다. 이제 다시는 서로 떨어져 그리워하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래. 이승에서 못 누린 영화, 우리 저승에서 다정(多情)으로 대신하자꾸나."

“여랑아! 형님! 아…! 그대들이 있어 내 새 희망을 품었건만 어찌 이리 떠나려하시는가…."

홍언박은 왕의 외사촌 형이었다. 사랑하는 정인이 있고, 복되고 평안한 땅에서 오순도순 살자는 굳은 약속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였다. 조정의 권세나 세상의 영화는 진작부터 외면했다. 다만 외세에 핍박받는 나라의 안위가 염려되어 홍언박은 안에서 왕을 보필하고, 여랑과 무빈은 밖에서 왕의 거룩한 뜻을 위해 은밀히 준비하자 미루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비로소 왕의 뜻이 펼쳐지려는 때, 그들은 먼저 떠나게 된 것이다.

“왕이시여, 끝까지 보필하지 못함을 용서하소서."

“무슨 소립니까. 제가 형님과 이 여랑에게 목숨을 빚진 게 얼마인데, 아! 하늘이시여…!"

“부디, 부디, 고려를 핍박받지 않는 자주국으로 만드소서…."

“오! 선왕들이시여, 부처님이시여. 이들의 영혼을 보살펴주소서…."

“왕을 지켜라! 반란의 무리를 척살하라! 왕후마마를 모셔라!"

손홍량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내궁 안으로 울려오고 있었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서 일흔다섯 노구의 몸으로 군사를 이끌고 달려온 것이다. 여랑과 홍언박의 시신을 끌어안은 왕의 눈에서는 하염없는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계속>


20110420
글=김정현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