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1] 인물열전 <24·끝> 김주영의 ‘타고난 전술가’ 의병장 임용상 스토리(청송)

  • 입력 2011-11-23   |  발행일 2011-11-23 제7면   |  수정 2021-05-29 20:28

Story Memo

청송에서 태어난 임용상(林龍相·1877~1958)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항일 의병장으로 활약한 인물이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가산을 털어 국난을 호소하는 격문을 보내 의병을 모았다. 당시 결성된 의병이 동해창의군이다. 동해창의군을 결성한 뒤 임용상은 대장으로 추대되어 영덕·청하·강구 등지에서 활동했다.

1907년 4월에는 산남창의진에 합류해 청송·영천·흥해 등지에서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다. 1909년 울산·언양·양산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체포되어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10년 한·일병합 특사로 출옥했다. 출옥한 뒤 해체위기에 처한 산남의진을 재정비하고, 청송·의성 등지에서 일본군 수비대를 공격했다. 하지만 안평전투에서 다시 체포돼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특히 임용상은 지형지물을 능숙하게 이용하고, 접투하는 날을 될 수 있는 한 그 지역의 장날을 선택함으로써 이웃 고을은 물론 먼 고장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이 대파된 사실이 전파되도록 했다. 이를 통해 창의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만큼 높다는 것을 과시했다. 영남일보의 ‘임용상 스토리’는 그의 타고난 전술을 주요 소재로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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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현서면 수락리 옛 수락초등 인근에 있는 임용상 의병장의 유허비.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1977년에 세워졌다. <청송군 제공>


 

불과 스물여덟의 나이, 그리고 청송 산골 현서면 수락동에 살고 있던 혈기방장한 젊은이는 어느 날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소식을 듣는다. 1905년 을사보호 조약이 맺어지고 말았다는 소식이 바로 그것이었다.


청천벽력과 같은 그 소식을 듣기까지 그는 산골 마을에 살고 있는 효자로서, 노모를 극진하게 봉양하며 임금으로부터 표창을 받고 글을 읽는 시골의 젊은 선비였다. 일찍이 지역의 명망가인 민응용의 문하에서 자치통감과 사기를 통달했을 뿐만 아니라 사서삼경 등에도 전혀 막힘이 없을 정도였고, 병서에도 일가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바로 그해 11월 영덕에서 김재서 등과 함께 창의군을 조직하여 동해창의대장으로 추대된 임용상이었다.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자, 울분을 삭힐 길이 없었던 그는 분연히 일어나 가산을 몽땅 털어 여러 고을에 국난을 호소하는 격문을 보내기에 이른다. 그 사발통문에 호응하여 모여든 동지들이 100여명이었다. 임용상은 그 중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패기가 있는 젊은이, 동해 방면과 내륙의 지리에 밝은 포수, 그리고 가근방 산협의 지름길에 능숙한 젊은 보부상을 중심으로 50여명의 정예군을 선발하여 창의군을 결성하였다.

포수들은 지형지물을 이용하는데 남다른 지혜를 가졌을 것이고, 젊은 보부상은 무거운 짐을 지고도 산중의 지름길을 이용하여 감쪽같이 은신하거나 재빨리 이동하는 민첩함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체없이 청하와 강구의 주둔소를 습격하여 일본군을 사살하는데 성과를 거둔다. 그것이 임용상이 이끄는 창의군이 거둔 첫번째 접전이었고, 개가였다. 그 모두가 평소에 병서를 탐독해 두었던 내력 덕분이었다.

1907년 4월, 산남의진(山南義進)의 대장 정욕기가 궐기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임용상은 그들이 동해 방면에 도착할 때까지 그 지역을 확보하기로 약속하고, 산남의진의 동해지구 유격장이 되었다. 그해 7월 드디어 산남의진이 동해 방면으로 진격할 때 청하읍을 함락시키고, 다시 휘하들을 궐기시켜 본진에 들어가 좌포장이 되었다.

그때 고향인 청송과 영천·신녕 등지로 진격하여 가는 곳마다 좌선봉에 서서 적을 격파하였다. 궐기한 장정들이 한결같이 임용상 휘하의 창의군이 되기를 원했던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그는 많은 병서를 읽었기 때문에 다수의 일본군과의 접전에 이르러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전열을 가다듬어 대치하였다. 그것은 또한 진격하고 퇴각함에 있어 지형지물을 능숙하게 이용할 수 있는 장정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가 오합지졸이나 다름없는 신병을 이끌고 보현산에 들어가 훈련을 마치고 내려오는 길에 흥해와 청하에서 무려 400자루의 총기류와 군수품을 노획하는 성과를 거둔 것도 결코 우연이 만들어 낸 결과라고 볼 수 없었다.

그는 부대가 이동할 때면 반드시 척후를 보내어 전진하는 길에 있을 적정을 면밀하게 살피는 것을 잊지 않았다. 척후뿐만 아니라, 매복까지 두어서 부대의 전열에 추호의 흐트러짐이 없도록 조치하였다. 마치 현대전에서나 있을 법한 전술을 구사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었다. 만에 하나 앞에서 강력한 적을 만났을 때 퇴각로를 어디로 선택할 것인가를 그 지방 지리에 밝은 포수 출신이나 보부상에게 물어 먼저 지정해 둘 만큼 용의주도했다. 또 한 가지, 접전하는 날을 될 수 있는 한 그곳의 장날을 선택하여 일본군을 격멸시킴으로써 이웃 고을은 물론 먼 고장에 이르기까지 일본군이 대파되고 말았다는 사실이 전파되도록 만들었고, 그로 말미암아 창의군의 사기가 하늘을 찌를 만큼 높다는 것을 과시하였다.

어느 날 휘하의 참모가 물었다.

“대장님, 어째서 통행이 번다한 장날에 접전을 하시려 합니까. 혹여 몽매한 민간이 욕을 당할 수도 있고, 당황한 아녀자들이 혼비백산하여 민심이 흉흉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좋은 지적입니다. 코 앞에서 접전이 벌어진다면 장터에 모였던 농투성이들이 아연실색하여 흩어지고 넘어지고 울고 불고해서 민심을 수습하는데 애로가 없지 않겠지요. 그러나 일본군의 주둔지는 원래 장터와는 먼 곳에 있기 마련이어서 피해가 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접전을 목격한 많은 백성들이 아직도 우리의 기백이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적의 손아귀에서 건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질 수 있게 됩니다. 혹여 유탄을 맞은 백성이 애통하게 목숨을 잃을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나라를 구하자는 전투에서 생겨난 희생이라면 어찌 감내하기를 두려워하겠습니까. 대의를 위하는 것이라면 사소한 희생쯤은 기꺼이 각오해야 하는 것입니다. 창의군 휘하에서 끼니를 굶고 헐벗은 몸으로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며 일본군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 형편을 살펴보십시오. 한 개인의 영달과 사소한 이득으로 가산을 일구자고 가족을 버리고 멀고 먼 타향에서 풍찬노숙의 고초를 겪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임용상의 전술은 천편일률적이거나 교과서적이 아니란 점에서 놀라움이 숨어 있다. 그것이 또한 백전백승의 결과를 낳게 한 기틀이 되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1908년 2월 그는 운문산 지역의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그때 경주·언양·양산·밀양·영산·창녕 등지의 적을 차례로 격파하고 군수물자를 노획하였다. 이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이제까지 전면전을 구사해온 전술을 일본군이 알아차리고, 그것에만 대비하고 있다는 적정을 파악한 연후에 치고 빠지는 산발적인 유격전으로 전술을 변경시킨 결과 얻어낸 전과였다.

그 해 5월에는 은신처였던 운문산으로 돌아가 의진을 정비하는 척하고 있을 때, 적의 수비대가 운문산 바로 아래까지 접근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가 창의군을 이끌고 하필이면 이미 일본군에서도 창의군의 은신처로 지목된 운문산으로 굳이 되돌아 온 것은 적을 유인하자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 유인책이 제대로 들어맞은 것이었다. 운문산으로 숨어드는 척 하면서 그는 계곡과 등성이 곳곳에 매복군을 배치하였다. 매복작전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본군은 매복군의 총탄에 그대로 노출되어 몰살하였고, 극히 일부만 살아 남아 도망쳤다.

같은 해 6월 언양읍의 장날이었다. 그는 부하들을 장보러 오는 농부로 가장시켜 언양읍에 횡행하고 있는 적의 동태를 정탐하였다. 그들의 주둔지, 수효, 화포나 무기의 수효 따위를 세밀하게 정탐한 뒤에 해가 지고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장꾼들이 흩어진 이후여서 피해가 없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또한 야간작전이야말로 실패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사전 정탐이 필수였다. 그는 척후를 보내어 적의 분견소를 직접 공격하지 않고, 분견소 옆 건물에 불을 질렀다. 태연했던 적병들이 난데없는 불길을 잡으려고 우왕좌왕하는 사이에 창의군이 분견소를 파고들며 공격했다. 이른바 서동격서의 전술이었고, 양동작전이었다.

창의군은 적이 혼비백산하면서 날뛰는 사이 이번에는 분견소에 직접 불을 질렀다. 임용상이 적의 주둔지나 분견소에 명화적(조선 중기 이후 몰락한 농민들이 도적으로 된 무리. 횃불을 들고 습격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처럼 불 지르기를 자주 구사한 것에는 까닭이 있었다. 훈련된 병사든 아녀자든 사람은 일단 불을 보면 큰불이든 작은 불이든 순간적으로 당황해서 우왕좌왕하기 마련이었다.

임용상은 바로 그런 인간심리조차 전술에 이용한 탁월한 전략가였다. 적이 가진 허점을 정확하게 읽어낸 뒤에 다양한 전술로 적을 타격할 줄 알았다. 생전 일제에 체포되어 3년 혹은 10년의 옥고를 여러 번 치르면서도 그의 꼿꼿한 선비정신과 애국애족의 정신은 퇴색할 줄 몰랐다. 그는 진정한 청송 사람이었고, 지조를 지킨 선비로서 일생 동안 절조를 잃지 않았다.

3·1운동 이래 의열단을 통하여 군자금 조달에도 힘을 기울였던 그에게 한가지 의문이 남는다. 여러 번의 옥고를 치를 동안 고문도 많이 당했을 것이고, 풍찬노숙으로 몸 또한 성치 않았을 것인데도 1954년 12월 77세로 별세했다는 놀라운 사실이 그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그의 가슴 속에 불같이 살아 있었던 선비의 지조와 언제나 태연자약하고 아랫사람을 먼저 섬겼던 그 넓고 큰 아량 때문이었을 것이다.

<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공동기획:Pride GyeongBuk

 

20111123
임용상 유허비 안내문. 선생의 활약상을 소개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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