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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연서원 입구에 있는 ‘곽재우 나무’. 수령 400년 된 느티나무다. 나무 옆으로 곽재우와 곽준의 신도비 비각이 보인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
#1 곽재우와 곽준 모신 예연서원
비슬산 기슭의 유가면 가태리에 있는 예연서원은 망우당 곽재우와 존재 곽준을 제향한 곳이다.
애초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맹활약한 곽재우가 죽은 다음해인 1618년(광해군 10)에 그의 덕을 추모하여 영남사림과 경상감영이 현풍면 솔례(현 대동)에 충현사를 건립했다. 그러다가 숙종 원년(1674년)에 당시 현풍 현감이 규모를 확장하여 서원을 창건했다.
그해 여름에는 정유재란 때 안음 현감으로 황석산성에서 왜적과 혈전을 벌이다 순절한 곽준의 위패를 함께 봉안했다. 1677년 예연서원이란 현액이 내려져 사액서원이 됐다. 현재의 자리로 이전한 것은 숙종 41년(1715)이다. 이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고종 5년(1868)에 폐쇄되었다. 그러다가 6·25 전쟁으로 완전히 소실된 것을 1977년 강당과 삼문, 장판각 등을, 1986년 사당을 비롯한 건물을 복원, 옛 모습대로 갖추었다.
부속 건물로 경의당과 장판각이 있다. 장판각에는 ‘우의록’ ‘망우당집’ ‘존재실기’ 등 판각이 보관되어 있다. 특히 두 사람의 신도비 2좌가 쌍립으로 서 있어 우국충정을 떠올리는 기념공간으로서의 의미를 더하고 있다.
곽재우와 곽준의 이야기는 비슬산 자락에 자리한 예연서원과 현풍곽씨 문중이 누대로 살아온 솔례마을을 이어주는 비장하면서도 전설 같은 무용담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2 홍의장군의 탁월한 매복과 기만전술
곽재우는 호가 망우당이다. 전쟁 중에는 붉은 옷을 입고 활약하여 홍의장군으로 널리 알려졌다.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 월이며, 조식의 외손녀 사위이면서 조식 문하에서 공부했다. 동강 김우옹과는 동문이자 동서지간이다.
1592년 봄 곽재우는 집안의 종 10여명으로 첫 의병을 일으켰다. 이불을 뜯어 깃발을 만들고, 자신은 붉은 관복을 입었다. 집 앞 정자나무에 북을 매달아 사람을 모으니 수십명이 달려왔다. 곽재우는 이들을 간단하게 훈련시켰다.
그해 5월4일 왜군의 척후선 3척이 남강을 거슬러 올라오고 있다는 첩보를 받고 선봉장 심대승 등 10여명이 달려갔다. 기강나무 부근에서 곽재우는 강가 갈대밭에 궁수들을 매복시켰다. 강 속에는 통나무로 말뚝을 박고 밧줄로 이어 배가 이동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꽤 오래 기다리자 왜선이 나타났다. 배들이 장애물에 걸려들었다. 빠져나오려고 애쓰는 그들에게 활을 쏘아댔다. 왜선은 맥없이 수장되고 말았다. 포도 없고, 활과 창뿐인 데다 10여명에 불과한 인원으로는 엄청난 전과였다. 이들의 승리 소식은 삽시간에 널리 퍼졌다. 여기저기서 의병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5월6일 2차 전투가 벌어졌다. 왜선 수송부대 11척이 나타난 것이다. 역시 통나무로 장막을 쳐서 배를 차단시키고, 재빠르게 공격하고 빠지는 전술을 사용, 수송부대를 전멸시켰다. 처음으로 대포도 쏘았다. 소가죽으로 만든 배로 적에게 접근하여 치고 빠지기도 했다. 왜군 60여명을 죽였다. 곽재우는 여세를 몰아 창녕에 우강산성을 쌓고, 곳곳의 강변에 의병을 매복시켰다. 왜병이 출몰하면 봉수로 연락하는 통신망도 짰다.
6월 초 왜군 2천명이 함안을 거쳐 의령 정암진으로 이동해왔다. 이에 맞서는 곽재우 의병도 규모가 커졌다. 윤탁, 오윤 등 17장령과 병력 1천명이었다. 곽재우는 잠복조를 구성, 감시망을 면밀하게 짰다. 적이 온다는 소식에 정암바위를 기준으로 동서로 병력을 배치했다. 왜군은 강이 넓어서 건너기가 어렵자 포로로 잡은 조선인을 문초하여 강이 얕은 곳을 찾아내어 말뚝을 박아 놓았다. 이를 알게 된 곽재우는 왜군이 없는 틈을 타 말뚝을 전부 뽑아 진흙탕 쪽으로 옮겨놓았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왜군들이 도강을 시작하자 선발대가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곽재우군은 이에 일제히 공격하여 섬멸했다.
곽재우는 병력을 정암진 외에 방어산과 가막산 쪽에 매복시켰다. 자신은 말을 타고 붉은 갑옷을 입었다. 이미 ‘홍의장군’으로 유명해진 바 있는 그 옷이었다. 홍의장군을 여러 명 만들어 유인조를 편성했다. 호각 부는 이들을 많이 모아 아군의 수가 많은 것처럼 소리를 내게 했고, 산 위에서 밤낮 횃불을 올렸다.
적이 총공격을 해오자 그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났다가는 적이 추격하면 사라지곤 했다. 적이 혼란에 빠지자 기습공격을 해 수백 명의 왜군을 죽였다. 결국 왜장은 창원 쪽으로 퇴각했다. 대단한 전공이 아닐 수 없었다. 이 싸움의 승리로 전라도로 들어가려던 왜군의 계획에 상당히 차질을 빚기도 했다.
이에 감탄한 경상우사 김성일은 의령군과 삼가군의 군사를 곽재우 의병장 휘하에 두도록 했다. 이후 곽재우는 일본군의 보급로 가로막기에 힘을 썼으며, 현풍·창녕·영산에 주둔한 일본군을 물리쳤다. 10월 김시민의 진주성 싸움에 자신이 거느린 의병을 보내 응원하기도 했다.
그는 전쟁 중에도 의병활동의 공로를 인정받아 여러 관직을 제수했으며, 전쟁 후에는 경상우도방어사에 임명되거나, 경상좌도병마절도사에 오르기도 했다. 나중에는 비슬산에 살면서 영산의 창암진에 망우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평범한 선비의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3 일가 오중 순사한 一門三綱의 장렬
정유년에 왜군이 다시 쳐들어왔다. 이른바 정유재란이다. 왜군 14만여 명이 남해안으로 상륙, 조계와 합천을 거쳐 북상했다. 진주성과 남원성 함락이 그들의 1차 목표였다. 이들 함락에 앞서 먼저 함락해야 할 길목이 황석산성이었다. 말하자면 황석산성은 왜군의 호남 진출을 위한 교두보였다.
제찰사 이원익은 급히 안음과 함양, 거창 등 3개 읍으로 하여금 황석산성을 지키게 했다. 당시 47세의 안음 현감 곽준은 성으로 들어가 성곽을 보수하고 병기와 기재를 정비했다. 그는 임진왜란 때 김면 등과 함께 거창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벌여 유명했다. 그로 인해 안음 현감으로 제수된 것이다. 함양군수 조종도가 가족을 이끌고 산성으로 들어왔다. 김해 부사 백사림도 도별장으로 가담했다. 이들은 황석산성 사수를 결의했다.
왜군들은 필사적으로 이 성의 함락에 매달렸다. 왜장 고니시 유기나가, 구로다 마가나사, 나베제마 마사시키 등이 직접 선봉에 섰다. 왜군들은 성을 겹겹으로 에워쌌다. 아군의 산성 방비도 튼튼했다. 관군과 의병은 물론 난을 피해 성안으로 들어온 백성은 모두 성 사수에 집중하고 있었다. 무기가 부족했으나 백성들은 죽창으로 무장을 했고, 부녀자는 치마로 돌을 날랐다.
백사림은 북쪽 험준한 곳은 자기가 맡겠다며, 곽준은 평지를 맡게 했다. 왜적이 평지로부터 밀어닥쳤다. 곽준은 활을 쏘아 적병을 거꾸러뜨렸다. 아군 모두 사기 충천하여 왜적과 대항했다. 왜적은 그 기세에 밀려 후퇴했다. 그러나 다시 밀물처럼 몰려왔다. 이에 겁을 먹은 백사림이 몰래 가족을 이끌고 동북 문으로 도망쳐버렸다. 백사림이 지키던 동북 문이 열리자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왜군들이 쳐들어왔다. 성안은 백병전이 벌어졌다.
“싸워라. 도망가는 자는 베겠다.”
곽준은 달아나는 자의 목을 베고 소리쳤다. 남문의 누상에서 그는 활을 당겨 왜군이 성벽을 오르는 것을 계속 쏘았다. 조종도가 남문으로 곽준을 찾아왔다. 그들은 “여기가 우리의 무덤”이라며 죽기를 결심했다. 그리고 나중에 적들이 무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군기고에 불을 질렀다.
전세는 기울어져 사방에 아군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아버지, 피하십시오!”
아들 이상과 이후가 고함치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곽준은 “여기가 내 죽을 땅”이라며, “나는 직책이 있으니 사수를 해야 하지만, 너희들은 빨리 피란하라”고 다그쳤다. 그러나 두 아들은 “아버지가 국가를 위해 죽으려 하시는데, 자식이 아버지를 위해 죽는 것이 불가하겠습니까?”라며 아버지를 양 옆에서 호위하며 싸웠다. 세 부자는 장렬하게 전사했다.
맏며느리 거창신씨는 남편을 따라 자결했다. 또한 곽준의 사위 유문호마저 장인을 구하러 나섰다가 전사했다. 그러자 딸은 “아버지가 전사해도 죽지 못하였음은 남편이 있기 때문이었는데 이제 남편마저 전사했으니 어찌 차마 살 수 있겠는가?”라며 목을 매어 자살했다.
일가가 오중(五重)의 순사를 한 것이니 그 참혹함이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전쟁 후 나라에서는 이를 기려 일문삼강(一門三綱)이라 편액하고 정려(旌閭)를 지어 길이 기념으로 삼게 했다.
글=이하석<시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공동기획 : 달성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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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우와 곽준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신도비. 나라가 어려울 때 땀을 흘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땀나는 신도비’라고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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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 달성군 유가면 가태리에 있는 예연서원. 1987년 대구시기념물 제11호로 지정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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