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2] 作家 경북음식을 이야기하다 <1> 김정현이 만난 명가의 고집 '조옥화 안동소주'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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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06-25   |  발행일 2012-06-25 제13면   |  수정 2021-06-02 14:59
천년의 깊이…귀족의 품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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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소주 기능보유자인 조옥화씨(오른쪽)와 며느리 배경화 전수자, 아들 김연박씨가 함께 멥쌀고두밥과 통밀을 갈아 직접 만든 누룩을 섞고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2010년부터 ‘스토리텔링의 寶庫-경북,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라’를 연재하고 있는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시리즈의 4부 ‘작가, 경북음식을 이야기하다’를 연재합니다. 시리즈는 경북도내 23개 시·군을 대표하는 음식을 주제로, 지역출신 유명작가들이 원고를 집필합니다. 단순히 음식을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작가 특유의 시선과 흥미로운 이야기를 곁들여 경북음식의 새로운 모습을 담아냅니다. 필진으로 김주영·이하석·성석제·김정현·이상국·조정일 등 한국문단을 대표하는 작가들이 대거 참여해 시리즈의 완성도를 높입니다. 독자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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멥쌀고두밥과 누룩을 발효시켜 만든 전술을 증류하는 소줏고리에서 소주가 방울져 떨어지고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1 어느 단풍 깊은 늦가을의 밤 9시, 뉴욕. 허드슨 강이 내려다보이는 분위기 좋은 스카이 바(bar) 창가에 중후한 사내 몇이 둘러앉아 술잔을 기울이고 있다. 오랜 세월을 함께한 벗들로 가끔씩 그렇게 모이지만 오늘 자리는 더욱 특별하다. 한동안 삶의 침체기에 빠져 우울하던 벗 하나가 새로운 기회를 잡아 재도약의 날개를 활짝 펴게 된 것이다. 테이블 위의 술은 200년 전통 조니 워커(Johnni Walker) 블루(Blue) 라벨의 프리미엄급 스카치위스키. 짙은 갈색 액체를 한 모금 입안에 머금으면 그윽하게 번지는 스모키향은 그대로 쌓아온 우정의 깊이를 느끼게 해 오늘의 즐거움에 격조를 더한다.



#2 신록 화창한 어느 5월의 저녁 7시, 파리. 멀리 에펠탑과 센 강변의 화려한 조명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몽마르트 언덕 레스토랑에서 한 쌍의 남녀가 정겨운 눈빛을 주고받고 있다. 오늘 결혼 10주년을 맞은 그들은 여전히 서로에게 설레고 행복하다. 말끔한 연미복 차림의 웨이터가 그들 축하연의 애피타이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다. 세계 3대 요리 중의 하나라는 ‘푸아그라’다. 부부는 투명한 크리스털 잔을 들어 가볍게 부딪힌다. 메종 델로의 소테른(Sauternes). ‘푸아그라’와 최고의 궁합이라는 화이트 와인이다. 달콤한 데다 알코올 도수까지 높아 여심을 유혹하기에 그만이라더니 아내의 눈빛은 어느새 황홀해진다.



#3 이제 한국이다. 사시사철 어느 때라도 상관없다. 다만 빛깔 고운 낙조(落照)가 바다를 물들이거나 산등성이에 걸린 저녁 무렵이면 더욱 좋겠다. 장소는 그 낙조를 지켜볼 수 있는 나무 그늘 아래거나 창 넓은 공간이면 금상첨화이고. 품이 넉넉해 편안해 보이는 옷차림의 우정 깊은 벗들끼리, 혹은 고운 눈빛 주고받는 연인사이라도 좋겠다. 주안상에는 신선한 육회 한 접시, 그게 싫으면 잘 삶은 수육이나 계절 꽃이 얹힌 화전(花煎)이 차려져도 좋을 것이다. 자! 이젠 백자로 빚어낸 작은 이슬잔에 한 방울 한 방울 이슬처럼 받아낸 맑은 ‘조옥화 안동소주’를 채워보자.

우리네 술자리에서 술은 권해야 맛이다. 비운 잔을 가볍게 물 잔에라도 헹군 뒤 마음 가는 이에게 건네고 술을 채워보라. 그건 정이고 사랑이고 마음이다. 석 잔은 훈훈하고 다섯 잔은 기분 좋다. 일곱 잔이면 흡족하고 아홉 잔은 지나치니 경계할 일이다. 그사이 몸은 단전에서부터 전신으로 퍼져나간 따뜻한 기운으로 원기왕성하다. 더하여 권커니 잣거니 하는 동안 나눈 이야기로 가슴은 후련하면서도 뭉클한 기운에 벅차기까지 하니…!

그래, 술은 그런 것이다! 마음을 열고, 정을 쌓고, 사랑을 나누고, 서로를 알아, 다르다 여겼던 영혼이 다르지 않음을 깨달아 하나가 되어가는 길의 윤활유, 동반자! 때로는 웃고, 때로는 눈물 쏟고, 울분을 토하고, 치미는 분노에 가슴 치는 인생의 굽이마다 함께해 온 술. 술의 역사는 인간의 역사만큼 길다.

과일은 제각각 얼마간의 당분을 함유하고 있어 그 당분이 발효하면 알코올이 된다. 포도가 대표적이다. 수렵과 유목에 익숙한 서양 사람들에게 술의 시작이 되었고 지금도 와인을 비롯한 여러 술이 음용되고 있다. 반면 일찍부터 농경을 깨우친 영민한 동양의 사람들은 곡물에 함유된 당분을 누룩이라는 매개체로 발효시켜 인공의 술을 빚었다. 중국 고대의 서적 ‘전국책(戰國策’에는 ‘의적(儀狄)이 좋은 술을 빚어 우(禹) 임금에게 바치니 달게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대략 3천 년 전의 일이니 그 역사를 짐작할 만하다.



#4 불판 위에서는 삼겹살이 지글지글 노랗게 익어간다. 잘 익은 삼겹살 한 점에 소주 한 잔. 저절로 ‘캬~!’ 소리가 터지고 시간이 흐를수록 목청도 높아간다. 상추 위에 삼겹살, 노릇노릇 익은 마늘에 된장과 고추장으로 버무린 쌈장까지. 회가 동하는 그 맛에 지루한 줄 모르던 아이들은 슬슬 배가 불러오자 따분하고 졸린다. 그만 집에 가자고 보채지만 이미 한 술 된 아버지는 요지부동. 칭얼대던 아이는 구석에 쪼그린 채 잠이 들고 술병은 쌓여간다. 아침에 눈을 뜨니 속은 쓰리고 머리는 지끈거리는데 지난밤의 기억이 가물거리니 혹시 실수라도 한 건 아닐까 그게 더 걱정이다. 다행히 큰 별 일은 없었다지만 공연히 혼자서 열 받아 턱없이 고함친 기억이 문득 떠오른다. 아뿔싸!

괜찮아, 산다는 게 다 그런 거지 뭐. 세상살이가 얼마나 팍팍한데. 맞는 말이다. 더구나 들끓는 젊은 피에 일그러진 세상의 어둠을 마주하노라면 어찌 통분하지 않으랴! 그러니 통분은 통음이 되고, 정의를 외치는 목소리는 점점 커져 기어이 목청이라도 상하지 않을까 염려스러운 지경이 된다. 좋다, 젊음. 이해한다, 삶의 고단함. 공감한다, 앞날의 막막함……. 그러나 달게 마시고 취했다가 깨어난 우 임금이 하셨다는 말씀을 이어서 들어보자.

‘술이 참 좋기는 하구나. 그러나 훗날 술 때문에 나라를 망치는 일이 있겠구나!’ 하시고 금주령을 내렸다고 기록한다. 혹시 지난밤 가물거리는 기억 속에 맨 정신에 생각나면 낯 뜨거울 일은 없었는지 곰곰이 자성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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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에게 바치니 달게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대략 3천 년 전의 일이니 그 역사를 짐작할 만하다.

서양의 과일 발효주, 동양의 누룩과 곡물로 빚은 술. 아직은 그리 알코올 도수가 높지 않았다. 당 나라 때의 시성(詩聖) 이태백(李太白)이나 삼국지의 맹장 장비(張飛)의 말술이 결코 허언이 아닌 것도 그 까닭이다. 포도주가 그러하듯 누룩으로 빚은 당시의 술은 대략 요즘의 막걸리와 비슷했으니. 그런데 불쑥 도수 높은 증류주가 역사에 등장한다. 특히 안동 지역에서 빚어온 우리 소주의 기원은 일반적으로 고려시대 몽골 침공군에 의해 제조법이 전해지며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다. 과연 그럴까?

뜻밖에도 증류주의 역사는 아주 길다. 기원전 2000년경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진 증류주의 아랍어 명칭은 알코올을 뜻하는 ‘아라끄(Araq)’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세계 4대 문명 발상지 중의 한 곳이기도 하지만 일찍부터 다른 어떤 지역보다 수학, 과학, 철학, 종교 등의 발전이 앞섰다. 그들은 인간이 영혼과 육체로 구성되어있듯 자연도 비슷하리라 여겼다. 중세 연금술의 이론적 바탕이다. 발효된 포도주가 육체라면 그것을 증류하면 영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가 성립되고, 그 결실이 증류주인 셈이다. 물론 지금은 이슬람 교리에 따라 대부분 술을 엄격히 금하고 있지만 일부 국가에서는 여전히 ‘아락(ARAK)’이라는 증류주를 생산, 판매하고 있다.

그런데 안동을 비롯한 경상도, 전라도의 여러 지역에서는 소주를 고고 남은 찌꺼기인 지게미나 소주를 ‘아래기’ ‘아랭이’ 등으로 불렀다. 개성에서는 소주를 ‘아락주’라 부르기도 했다. 모두 아랍어 ‘아라끄’에서 파생된 변형어로 보아도 무방한 것이다. 몽골어도 비슷한 ‘아라키(araki)’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우리 소주의 전래시기를 고려 때로 특정한다는 것은 잦은 전란으로 인한 문자 사료의 부족을 고려하지 않은 단견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안동 지역은 고대로부터 고타야(古陀耶)로 불린 신라의 땅이었다. 또 신라는 이미 페르시아나 로마와 연결되는 여러 유물의 발굴이 증명하듯 북방의 스텝로드나 남방의 해양 루트를 통해 중동을 비롯한 서방 제국(諸國)과의 교류가 활발했던 개방적 국가였다. 그런 교류 속에 증류주의 제조법이 전래되지 않았다면 오히려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그러니 신라 땅에 진작부터 있어온 소주가 몽골군의 취향과 맞아떨어져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고 보는 게 훨씬 합리적이지 않을까? 결국 안동 지역의 전래 소주는 고려시대가 아니라 신라시대부터 시작된, 최소 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우리 전통주라는 것이다.

그런데 안동소주는 근본적인 문제 하나를 안고 있다. 다름 아닌 ‘귀족성’이다. 우선 안동소주는 80㎏ 쌀 한 가마니로 겨우 70여병의 소주를 생산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 최근 20∼30년을 제외하고는 내내 쌀이 부족했던 우리 역사에서 다른 어떤 술보다 귀하고 비싼 ‘귀족주’였던 것이다. 또 전래된 안동소주의 알코올 도수는 신기하게도 세계적 명주의 그것과 유사한 45도였다. 45도는 증류주의 향이 가장 깊고 좋은 맛을 내는 도수이다. 그래서 약삭빠른 세태 속에서도 ‘조옥화 안동소주’만은 지금도 오로지 45도주만을 고집한다. 게다가 전통의 누룩제조법을 고수하기에 인공감미료에 길들여진 입맛에는 간혹 누룩향이 거북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무작정 전통을 고집하는 완고함이 아니라 아홉 잔 이상 권하지 말라는 주도(酒道)의 그것처럼 품격과 함께 건강을 배려하는 원칙이니 오히려 기꺼운 마음으로 자연의 맛을 되찾아 즐겨야 할 일이다.



변화무쌍한 세상살이, 거친 통음으로 마음을 달래야 할 날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오랜 벗과 정겨운 우정을 나눌 때, 마음 깊이 존경하는 이를 모시고 인생의 깊이를 들을 때, 천년쯤 사랑하고픈 이와 눈빛을 나눌 때는 그만큼의 세월과 품격을 담은 술 몇 잔은 곁들여야 하지 않을까. 높은 알코올 도수와 누룩향이 부담스럽다면 지혜를 더하면 될 일이다.

기이하게도 ‘조옥화 안동소주’와 맥주를 1대 8정도의 비율로 섞으면 특유의 누룩향은 잘 익은 스모키향으로 변해 목넘김이 아주 편하다. 그렇다고 ‘폭탄주’는 아니다, ‘칵테일’이다. 아홉 잔에 이르지 않으면 웬만한 이들에게는 숙취도 없다. 이를 일러 ‘바이오주’라고도 하는 모양인데 내가 보기에는 쌀과 보리가 잘 어울린 화회(和會)와 회통(會通)의 ‘화쟁주(和淨酒)’다. 역시 품격 높은 정신문화의 도시 안동과의 인연은 운명인 모양이다.

“자, 진정한 귀족과 양반의 가치는 품격에 있다. 오늘 ‘조옥화 안동소주’로 우리의 우정과 사랑에 천년의 품격을 더하자!”


◇Story Memo

전통 소주는 희석식 소주가 아니라 증류식 소주다. 그 증류식 소주를 대표할 만한 한국의 전통 소주가 안동소주다. 안동소주는 가장 단순하면서,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빚은 소주다. 한국적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지역출신 시인인 유안진은 안동소주를 ‘사나이의 눈물 같은, 피붙이의 통증 같은, 첫사랑의 격정 같은 내 고향의 약술’이라고 노래했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갈 때 화끈거리는 불의 힘이 느껴지는 45도 화주(火酒). 그만큼 안동소주에는 우리네 모습과 정서가 깊게 배어있다. 시리즈의 첫회 ‘명가의 고집-조옥화 안동소주’는 안동소주의 내력과 전통소주의 우수성이 세계 어떤 명주와도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는 내용을, 작가의 독특한 시각으로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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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김정현(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공동기획:p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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