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2] 作家 경북음식을 이야기하다 <6> 김정현이 만난 삼강주막과 예천 용궁순대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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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07-30   |  발행일 2012-07-30 제11면   |  수정 2021-06-02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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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현

◆ Story Memo
예천군 풍양면 삼강주막(三江酒幕). 길손도 모이고 강물도 모여드는 곳이다. 태백 황지에서 내려온 낙동강과 안동 내성천, 그리고 문경 금천이 서로 만나는 자리에 바로 삼강주막이 서 있다. 영남대로의 딱 중간지점인 이곳은 강을 건너던 나루가 있던 곳으로, 과거를 보러 가던 선비와 보부상, 뱃사공 등 길손들이 찾아들어 주막이 번성했다. 이 때문에 길손들의 허기를 달래던 음식이 유난히 발달했다. 순대국밥부터 막걸리와 국수 등 종류도 다양했다.

삼강주막과 더불어 예천은 용궁순대로 유명하다. 예천군 용궁면에는 특별한 순대집들이 있다. 웬만한 순대는 소창이나 대창을 사용하지만 용궁순대는 ‘돼지 막창’을 쓰는 것이 특징이다. 가격이 두 배 이상 차이 나지만 살이 도톰하고 쫄깃해 순대의 씹히는 식감을 위해 아직도 막창을 고집하고 있다.

손으로 직접 빚는 전통제조법을 고수하고, 지역에서 생산하는 부추·파·찹쌀·선지·한약재 등 10여가지의 영양 많고 신선한 재료를 사용해 맛이 깔끔하다. ‘작가, 경북음식을 이야기하다’ 6편은 예천 삼강주막의 음식과 용궁순대에 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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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풍양면 삼강리에 있는 조선 말기 전통주막인 삼강주막. 강을 건너온 보부상과 선비, 그리고 뱃사공들이 이곳에서 허기를 달래며 하루를 묵어가곤 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소백산맥 남쪽 기슭에서 발원한 내성천(乃城川)이 예천 회룡포를 감싸 돌아 문경에서 흘러나온 금천과 마주하면 곧바로 낙동강과 몸을 섞는다. 그렇게 내성천과 금천, 낙동강 세 강이 만나는 곳이라 해서 삼강(三江)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영남대로의 중간지점인 이곳은 나루가 있던 곳이다. 이 때문에 자연히 주막도 함께 들어섰다.

농경이 삶의 근본이고 거의 전부이던 시절, 사람들에게 강은 쉽사리 넘나들 수 없는 장벽 그 자체였다. 그렇지만 장벽이 아무리 높아도 넘나드는 사람이 있듯이 강 또한 그랬다. 아무리 깊고 거칠어도 강을 건너는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모험심이 앞선 탐험가와 같은 거창한 이가 아니었다. 자식과 아내의 목구멍을 메마르지 않게 하려는, 식구의 생계와 좀 더 나은 꿈을 위해 길 없는 길을 두려운 마음으로 찾아 나선 사람들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이들이 보부상이다. 그들은 이문을 추구하는 장사꾼이었지만 멀리 떨어진 이쪽과 저쪽의 상이한 물산을 전파해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드넓은 산천과 세상의 수많은 소식을 두루 보고 듣는 ‘첨단 여행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거운 등짐을 지는 것과 하루에 수십 리를 걷는 고단한 행보는 뱃속을 든든히 채우지 않고서는 어려운 노릇이었다.

과것길에 나선 유생도 마찬가지였다. 그나마 지평선이 펼쳐지고 바다가 가까워 온갖 먹거리의 구색이 갖춰진 남녘 땅 유생이라면 굳이 치열한 과거의 장(場)에 목매지 않아도 되었다. 아니, 오히려 끝없는 눈치 보기의 살벌한 정쟁(政爭)은 애초부터 외면하고, 유유자적 예(藝)를 즐기며 한 세상을 보낼 수도 있었고 또 그런 이들이 있었다. 어쩌면 그런 까닭에 예부터 남녘 땅 여러 곳이 예향으로, 맛의 고장으로 부러움을 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낙동강 상류 언저리의 궁벽한 고을은 사정이 달랐다. 순흥벌이니 안동벌이니 상주벌이라고 해도 지평선은커녕 아득한 준령이 시야를 막고 있었다. 가진 이라 해봐야 기껏 몇 백석지기. 유유자적과는 애초부터 인연이 없었다. 호구지책을 위해서라도 학문과 관직에 목을 매야 했다. 이 때문에 과것길에 나서는 걸음은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쩌랴! 북쪽 준령을 넘는 길은 산이 깊어 도적을 비롯한 온갖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이름부터 추풍낙엽처럼 떨어질지 몰라 피했다는 ‘추풍령’이었으니 그만큼 돌아가고 싶은 길이었다. 결국 ‘문경(聞慶)새재’로 방향을 잡아야 했고, 삼강마을에서 강을 건너야 했다.

이 때문에 삼강마을의 주막은 번성했다. 보부상 패거리에 과것길 유생, 소금 등 각종 물물을 운반하는 뱃사공, 관청 일로 이동하는 관리가 주막을 드나들었다. 서둘러 강을 건넌다 해도 문경새재까지는 또 한나절 길이니 그들 대부분은 삼강주막에서 든든히 배를 채워야 했다.

요즘에야 장국밥이라면 당연히 쇠고기 양지머리나 사태로 풍성한 맛을 내지만 그 옛날 작은 시골 주막에서 귀하디귀한 쇠고기를 쓴다는 건 언감생심. 아마 장국밥의 실체는 삶은 시래기에 된장을 푼 시래기국밥이거나, 어렵사리 구한 선지로 맛을 낸 선지국밥 정도였을 것이다. 그런데 보부상이며 노 젓는 배꾼 등 힘 쓰는 일을 하는 이들은 물론이고, 멀고 먼 과것길에 나선 이도 왠지 시래기국밥 정도로는 금세 허기가 밀려들던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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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창에 찹쌀과 당면, 채소, 선지를 넣어 만든 예천 용궁순대.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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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머니, 며느리, 손녀로 3대째 이어져 오고 있는 예천 용궁순대 ‘단골식당’ 2대 안주인 김정애씨가 오징어불고기를 연탄불에 굽고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순대는 그 기원을 딱히 정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져온 먹거리다. 양의 창자에 그 피와 고기 등을 넣어 만든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그렇다고 안동이나 예천 언저리의 궁벽한 산골에서 양을 기르지는 않았을 터. 아니, 그에 앞서 이미 아득한 예전부터 창자 속에 이런저런 것들을 넣어 ‘순대’라는 이름의 먹거리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어떻게든 전해졌을 테니…. 진작부터 주막에서는 순대국밥이 장국밥보다 더 주인노릇을 하고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참으로 궁핍한 역사였다. 그것은 오직 좁은 땅덩이와 궁벽진 산골 운운하는 타고난 운명을 탓할 일이 아니었다. 오직 땅을 일구는 농경에만 매달린 까닭이었다. 어쨌거나 곡물과 푸성귀에만 의존하는 삶은 단백질과 지방 부족으로 푸석거렸다.

농경의 바탕이 되는 소는 특별히 나라의 허가를 받아야 잡을 수 있었을 뿐더러 그마저도 서민은 먼발치에서 냄새나 맡을 수 있을 뿐이었다. 닭이 있었지만 그놈은 알을 낳으니 귀한 손이라도 맞이하면 모를까 아무 때나 널름 잡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대식구에 한두 마리 잡아서는 공연히 입맛만 버려놓을 일이었다. 그러니 가장 수월하고 넉넉하게 먹을 수 있었던 것이 돼지고기였다. 그것은 더없는 먹거리요 영양원이었다. 즐거운 축제에서도, 슬픈 상사(喪事)에서도, 일상에서도…….

어쩌다 잡게 되는 돼지 한 마리. 뼈다귀에 발목까지 버릴 것도, 버릴 리도 없는 먹거리였다. 그런데 창자를 두고서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양은 그 피와 고기를 같이 넣어 순대를 만든다지만, 기름지고 감칠맛 나는 돼지고기를 굳이 창자 속에 쑤셔 넣어 먹을 까닭이 없잖은가.

영민한 이 땅의 아낙들이 먼저 머리를 썼을 것이다. 쌀이나 찹쌀 같은 곡물에 부추, 숙주, 파 등의 채소를 돼지 피와 같이 양념해 속을 채우고 쪄내니, 어라! 이거야말로 쫄깃하게 씹히는 질감에 고기와 채소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잘 차린 밥 한 상 전부의 맛이 아닌가! 게다가 속을 꽉 채운 곡물은 순대 한 접시면 한 끼 요기로도 충분하니 어찌 길손의 사랑을 얻지 않으랴.

돼지 부속물 고기 몇 점 곁들인 순대국밥 한 그릇,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순대 한 접시에 막걸리 몇 잔. 남녀노소, 빈부의 차이를 뛰어넘는 사랑 속에 바로 곁에 있음에도 별달리 인식하지 않던 세월까지 있었다. 그것은 갑자기 찾아온 천년 가난의 질곡을 끊은 풍요 속에서 굽고 지지고 볶는 요란함에 취한 까닭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잠시나마 사라진 적도 없으니 김치나 된장처럼 일상이 된 연유이리라.



 

인근 상주골의 앳된 처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홀린 듯 예천 용궁마을의 한 총각에게 시집을 왔다. 새댁이 된 처녀는 벌써 30년째 시어머니가 해오는 ‘단골식당’ 일을 거들며 점차 안주인이 되어 갔다. 순대나 국밥은 일상이 된 세상이니 시어머니도 상호에 순대를 넣지는 않았다. 묵묵히 순대를 만들던 여인의 머릿속에, 가끔 질긴 질감으로 씹는 맛을 버리는 소창보다 막창순대는 어떨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막창은 지금도 대부분 그렇지만 굽거나 볶아서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는데, 일단 씹는 맛은 질긴 편이었다. 그러나 여인은 삶거나 쪄내면 질감이 달라지리라 여겼다. 작심하고 속을 채워 쪄내니 질긴 식감은 쫄깃쫄깃해졌고, 두꺼운 막창에서 배어나온 육즙은 구수한 맛을 내 소창순대의 맛을 뛰어넘었다. 여인은 막창 특유의 냄새만 줄이면 새로운 순대가 되리라 자신하며 오랫동안 애썼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예천 용궁마을에 길손이 찾을 리 없었다. 강 위로 다리가 놓이고 그 번성하던 영화를 잃은 게 수십 년이니 그새 삼강주막도 동리 아이들에게조차 낯선 이름이 되어 갔다. 그렇게 모든 것이 사라져 가는 세월에, 퇴락한 용궁마을의 낡은 식당을 지키며 묵묵히 순대를 만들어오던 여인은 혹여 희망을 품었던가?

시어머니가 세상을 버리고 집주인이 된 여인에게 어느 날부터인가 햇살이 비치기 시작했다. 떠난 이들이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도시에서의 삶에 지쳐 자연과 옛것의 흔적에서 위안받으려는 길손들의 걸음이 이어진 것이다. 인근의 삼강주막이며 회룡포 등지를 돌아보고 낡은 옛 간판의 향수에 젖어 여인의 식당에 들렀던 이들이 막창순대 맛에 눈이 휘둥그레지며 입소문을 내기 시작했다. 개중에는 제 삶의 터로 돌아간 뒤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해 탁송을 부탁하는 이까지 있었다.

삶은 혼자서 사는 것이 아니고 영화도 독점으로 누리려 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법. 여인의 좁은 식당에 손님이 넘쳐나자 형제와 이웃들도 하나둘 막창순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특정인이 아니라 마을이 들썩이자 지방자치단체도 팔을 걷어붙일 수 있었다. 브랜드화 작업에 나서고 전통음식타운 조성을 계획했다.

갑자기 많은 것들을 잃어버린 세월이었다. 바로 곁에 있어 그러려니 했으나 어느 날 돌아보면 사라져버린 많은 것들. 먹거리라고 다르지 않다. 명색만 남아 있을 뿐 그 맛은 이미 흔적조차 없는 것들이 얼마이던가. 그래서 아득한 옛적부터 오늘까지, 있는 듯 없는 듯 우리네 곁을 지키다가 이제 저마다의 이름까지 얻은 순대의 부활이 참으로 기쁘다.

글=김정현(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고문)
공동기획:p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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