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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도토리수제비는 도토리와 찹쌀가루로 만든 수제비와 인삼, 은행, 쇠고기 등을 한방 육수로 끓여낸 보양식이다. 원조는 고령군 쌍림면 대원식당에 가면 맛볼 수 있다.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1
고령을 대표하는 음식은 무엇일까?
얼핏 떠오르는 게 개실마을 한과다. 개실마을은 영남 사림파의 종조로 꼽히는 점필재 김종직 선생 후손들의 집성촌이다. 이 집안에 꾸준하게 이어져 내려온 한과이니 특별할 수밖에 없다. 지금은 하나의 상품으로 전환됐다. 이름 하여 ‘종家손手’. 백화점으로 공급되는 세 종류와 일반용으로 판매되는 세 종류로 나뉜다.
그 다음으로 꼽을 수 있는 게 최근 생겼다. ‘대가야진찬’이 그것이다. 고령군이 외식 전문 컨설팅업체의 용역을 통해 이 식단을 짰다. 들깨감자옹심이정식 등 성인 메뉴 4종과 라이스 크로켓과 화이트 쌀떡볶이 등 어린이 메뉴 3종, 그리고 고령연근떡갈비와 버섯무침회 등 모두 16가지 음식으로 구성된 상차림 메뉴다. ‘대가야진찬’은 고령 지역 음식점과 체험마을인 황금터숯불촌, 밥향기, 고령명품한우, 가얏고마을, 개실마을 등 5곳에서 맛볼 수 있다. 군은 앞으로 대가야진찬 취급 업소에 대해 SNS 등을 활용한 온·오프라인 홍보 활동을 지원하며 정기적인 기술교육도 진행할 예정이다.
그러나 필자는 고령의 유명 음식으로 이런 화려한 식단보다는 보다 서민적이고 폭넓은 관심을 모으는 소박한 밥상을 꼽고 싶다. 그중 하나가 ‘인삼도토리수제비’다. 오랫동안 이 지역의 서민식단에서 여러 가지로 변이를 하면서 요리되어온 도토리묵. 전국 어느 곳에서나 약간씩 다른 조리법으로 만들어져 온 만큼 우리의 입맛에 아주 익숙한 음식이다. 이 묵을 수제비로 만들어서 국을 끓이는데, 인삼 등 보양을 위한 각종 재료를 곁들였다. 웰빙 바람을 탄 이른바 퓨전 음식인데, 입소문을 타고 퍼져나가 꽤 유명해졌다. 그래서 지금은 인터넷 검색에 고령 음식이라 치면 으레 이 음식이 빠지지 않고 소개되는 정도가 됐다.
#2
도토리는 떡갈나무를 비롯한 갈참나무·상수리나무·신갈나무·졸참나무 등 참나무 종류의 열매다. 꿀밤이라고도 한다. 오래전부터 식용을 해왔지만, 특히 가뭄이나 흉년으로 먹는 문제가 지난한 지경이면 도토리로 만든 묵이 밥 대신 상에 올랐다. 이른바 구황식품이다. 예부터 쭉 그랬지만, 일제 강점기와 수백만의 사람이 헐벗고 굶주렸던 6·25전쟁 동안 많이 먹었다. 그래서 우리의 체질 에는 원초적인 맛으로 도토리의 맛이 배어 있는지도 모른다. 세월이 흐르며 도토리묵은 빈곤의 상징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메밀묵 등의 다른 묵을 쉽게 구할 수 있게 되면서 점차적으로 수요가 감소했다.
고령지역에는 예부터 참나무가 많았다. 마을을 둘러싼 산간에는 가을이면 누르스레하니 참나무 단풍물이 들어 엷은 수채화 풍경을 이룬다. 기실 고령지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어느 농촌에서나 볼 수 있는 낯익은 풍경이다. 이때가 도토리를 줍는 적기다. 마을의 뒷산이나 앞산 할 것 없이 줍는 이가 늘어난다. 농사 틈틈이 주워 모은다. 부지런하면 가을 동안 꽤 주울 수 있다.
도토리의 겉은 단단하고 매끄러운 껍질로 싸여 있다. 열매의 크기도 다양하다. 통통한 것도 있고 가늘게 길쭉한 것도 있다. 상수리나무 열매를 상수리로, 졸참나무의 열매를 꿀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렇게 가을 내 모은 도토리를 말려서 껍질을 벗기고, 가루를 내어서 묵을 쑤어 먹는다. 도토리나무를 참나무라 한 것은 아쉬울 때 식용으로 할 것으로는 으뜸으로 쳤기 때문이리라. 도토리는 탄수화물과 지방이 많다. 전세계적으로 고대의 주거지에서 도토리가 발견된다. 그만큼 식용의 역사가 길다.
1974년 서울 암사동에서 BC 5천년 것으로 보이는 신석기시대 주거지가 발굴되었을 때, 탄화된 도토리알 20톨이 나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신석기 때에는 산야의 과일이나 열매를 따먹었는데, 도토리가 그중 식용으로 각광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벼와 보리를 경작하게 되면서 주식이 바뀌게 되었지만, 가뭄이나 흉년이 들었을 때는 여전히 도토리가 제일 생광스러운 구황식품이었다. 곡식을 대신하거나 묵이나 빈대떡을 만들어 먹었다. 오죽하면 “도토리나무는 들판을 내다보고 열매를 맺는다”고 했을까? 도토리가 구황식물로 중요시되면서 관청이나 마을의 지도자들은 일부러 마을 인근에 참나무 숲을 조성해 기근에 대비해오기도 했다.
요즘은 구황식으로보다는 우리의 고유 음식을 맛보려는 기분으로 찾는 이가 많다. 묵 외에도 수제비나 국수를 만들어 먹기도 한다. 다른 묵과 마찬가지로 도토리묵은 무침으로 먹거나 양념장을 위에 뿌려 먹는다. 양념장은 간장, 참기름, 당근, 양파, 마늘, 고춧가루, 깨소금 등을 섞어 만든다.
도토리는 탄닌 성분이 많아서 쓰다. 날것으로 먹을 수가 없다. 사용하기 전에 탄닌 성분을 최대한 제거해야 한다. 껍질을 까서 곱게 갈아낸 가루를 물에 우려낸 후, 앙금을 가라앉힌 뒤 걸러내면 도토리 가루 속의 섬유소와 전분 성분을 분리할 수 있다. 이런 과정에서 탄닌 성분도 빠져나간다. 탄닌을 최대한 제거하기 위해서는 여러 번 물을 갈아주어야 한다. 앙금은 그릇의 바닥에 가라앉게 되므로, 윗물만 모두 따라낸 후 앙금을 말린다. 그런 다음 곱게 빻는다. 가루를 물과 섞어 걸쭉한 농도가 되도록 끓여 용기에 담아 식히면 도토리묵이 된다.
도토리묵을 웰빙식품으로 찾는 이들이 늘어나서인지 그 효능에 대한 관심도 더욱 커지고 있다. 최근에는 도토리에서 빼낸 아콘산(acornic acid)으로 환경오염의 주범인 중금속을 제거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됐다고 한다. 그뿐 아니다. 최근 들어 도토리 예찬론이 많이 나온다. 도토리는 피로회복 및 숙취에 탁월한 효과가 있고 소화기능을 촉진시키며 입맛을 돋워준다. 장과 위를 강하게 하고 설사를 멎게 하며 강장 효험을 볼 수 있다. 당뇨 및 암 등 성인병 예방에 효과가 있다. 입 안이 잘 헐고, 잇몸에서 피가 자주 나는 경우에 효능이 있다. 또 목구멍이 아프고 침을 삼킬 때 거북한 사람, 감기를 자주 앓는 사람에게도 효과를 발휘한다. 한편 화상 입은 자리에 도토리 가루를 바르면 통증이 사라지고 빨리 아문다.
‘동의보감’에는 늘 배가 부글거리고 끓는 사람, 불규칙적으로 또는 식사를 끝내자마자 대변을 보는 사람, 소변을 자주 보는 사람, 몸이 자주 붓는 사람에게는 도토리묵 한 가지 섭취로도 원인치료가 쉽게 이루어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치질을 다스리고 하혈과 혈통을 그치게 하며, 장을 튼튼히 하고 마른 사람을 살찌게 하며 설사를 다스린다. 1989년 과학기술처에서는 도토리에 항암 작용이 있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성질은 따뜻하고 맛은 떫고 쓰다. 그러나 독은 없다. 60~80%가 녹말이다. 설사를 자주 하는 사람이 도토리를 먹으면 설사를 그치게 되는 것은 바로 탄닌 때문이다. 도토리는 속이 차며 몸이 약한 사람이 먹어도 설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는 중요한 약식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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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도토리수제비의 주 재료인 도토리. 겉은 단단하고 매끄러운 껍질로 싸여 있고 열매의 크기도 다양하다. br 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이처럼 역사가 오랜 도토리묵이 변형된 것이 고령지역에 나타났다. 인삼도토리수제비. 도토리묵을 수제비로 만들어 국을 끓이는데, 거기에 인삼과 버섯, 은행, 잣 등을 넣어 보양화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국이 비싼 것도 아니다. 서민이 부담을 안 가질 보통 음식의 값으로 판다. 그리하여 일반인이 즐겨 이용하게 되고, 보양식품으로 소문이 나면서 이 식당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원조로 꼽히는 게 대원손칼국수집이다. 권정순씨(61) 부부가 많은 노력과 정성을 쏟아 부어 그 개성을 살려 알려진 식당이다. 고령읍에서 합천 가는 도중 쌍림면 소재지 못 미쳐 식당이 있다. 이 집에서는 소 등뼈를 넣고 푹 끓여낸 육수에 인삼과 대추 등을 듬뿍 넣어 푸짐하게 수제비를 더해 끓여낸다. 무엇보다 버섯과 쇠고기, 인삼, 은행, 대추, 파, 잣 등 화려한 고명이 식욕을 돋운다. 맛은 담백하면서도 웅숭깊고 시원하다. 국물 맛이 의외로 아주 깔끔한데, 미끌미끌하면서도 도톰한 살이 밴 수제비가 입안에서 우물거리는 맛이 일품이다.
“처음에는 감자수제비를 했는데, 강판에다 감자를 갈아 수제비로 만들기가 힘들었죠. 그러다 친정 엄마가 준 묵이 약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꼬들꼬들해진 것에 착안, 수제비를 만들었지요.” 마침 집 뒤에 꿀밤나무가 지천이었다. 부지런히 꿀밤을 주워서 물에 불리고, 가루를 만들어서 수제비로 만드는 ‘실험’을 계속했다. 1년도 넘게 시행착오가 이어졌다. 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지만, 겉은 익으나 안은 안 익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그런 어려움을 해결해서 수제비를 만들고 나서 다시 문제가 된 게 육수였다. 꿩국물, 돼지고기국물 등이 다 맞지 않았다. 소뼈를 우려낸 국물이 가장 잘 맞는 걸 알아냈다. 그 국에다 해바라기 씨도 넣어보고 검은 콩도 넣어보는 등 고명에 대한 실험도 계속했다. 그리하여 삼계탕에서 착안하여 대추를 넣고 잣을 넣었으며, 국물이 멀건 걸 방지하려 팽이버섯도 넣었다. 거기다 인삼을 넣고 쇠고기를 넣어 국물 맛이 어우러지게 했다.
“수제비 만드는 법과 육수 만드는 게 비법이지요.”
도토리로 수제비를 만들고, 그걸 끓일 육수를 만드는 게 결코 만만치 않다는 자랑이다. 대원식당이 유명해지면서 매스컴을 타기 시작하자 분점을 내려는 이도 늘어났다. 그리하여 포항과 진주, 구미 등에 분점이 생겼다. 대구에도 두 군데나 분점이 생겨났다. 지금은 권씨 부부의 아들이 육수 비법을 익혀서 이들 분점에 전수를 해주고 있다.
고령의 음식으로 꼽히는 인삼도토리수제비는 과거의 전통음식이 최근 새롭게 조명을 받는 가운데, 우리 민족의 근원적인 입맛인 도토리묵을 업그레이드시켜 전통과 현대를 새롭게 통합시킨 좋은 예로 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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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기획: eride GyeongB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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