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9월, 남영동 대공분실에선 무슨 일이…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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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10-29  |  수정 2012-10-29 08:33  |  발행일 2012-10-29 제22면
■ 주목받는 실화영화
20121029
영화 ‘남영동1985’



이야기의 힘, 특히 실화의 힘은 강력하다. 다수의 영화가 진정성 있는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하고 싶어 하지만, 실화를 다룬 영화만큼 그 효과가 강렬한 것은 없다. 올 가을 극장가에 심상치 않은 실화바람이 불고 있다. 그 근원지는 고(故) 김근태 국회의원의 자전적 수기인 ‘남영동’을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 ‘남영동1985’다. 제1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첫선을 보인 ‘남영동1985’는 지난해 사회적 반향을 불러온 ‘도가니’ ‘부러진 화살’에 이어 또 한번 한국사회에 뜨거운 감자로 떠오를 전망이다. 영화는 고 김 의원이 22일간 온몸으로 겪어냈던 가슴 아픈 폭력의 진상을 들춰낸다. 벌써부터 반응이 심상치 않다. ‘부러진 화살’을 만든 정지영 감독이 메가폰을 잡은 작품이라 더욱 그렇다.

◆역사 속에 감춰진 22일간의 진실…‘남영동1985’

1980년대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은 민주화 인사들에겐 공포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이었다. 바로 무고한 시민도 빨갱이로 만들어버릴 만큼 잔혹한 고문이 행해졌던 장소.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1985년 9월, 이곳으로 끌려가 22일간 끔찍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당시의 경험을 수기 ‘남영동’에 소상히 밝혀뒀고, 오래전부터 고문에 관한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정지영 감독은 ‘남영동’을 읽는 순간 “바로 이거다” 싶었다. 정 감독은 “처음 이근안 얘기를 픽션으로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런데 ‘부러진 화살’ 개봉 직전 김근태 의원이 돌아가셨고, 그때 우연찮게 김근태 의원의 수기를 보고 영화로 다루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실존 인물을 ‘부러진 화살’에 이어 연속으로 다루게 됐지만, 결코 계획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말했다.

‘남영동1985’는 러닝타임 110분 가운데 100여분을 고문 묘사에 할애한다. 그만큼 영화를 보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얘기다. 감독의 의도는 분명하다. 영화를 본 관객이 극 중 묘사되는 고문을 실제처럼 느끼고, 그들도 아파했으면 좋겠다는 것. 정지영 감독 역시 촬영 내내 마치 지옥도에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정 감독은 “처음에는 ‘어차피 영화니까’란 마음이었는데, 나중에는 영화를 다 찍고 나서도 그 감정이 누적된 건지 너무 힘들었다. 30년 영화인생 중 가장 힘들었던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출연자 대부분은 ‘부러진 화살’에서 정지영 감독과 호흡을 맞췄던 베테랑 연기자들이다. 여러모로 쉽지 않았던 촬영이었던 만큼 그에겐 든든한 지원군인 셈이다. 극 중 김근태 의원은 김종태(박원상 분)란 이름으로, 고문 기술자 이근안은 이두한(이경영 분)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여기에 문성근 김의성 이천희 등이 가세했다. 이들이 이렇게 1년 만에 다시 한 번 모일 수 있었던 건 정 감독을 향한 존경과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또한 이들은 노개런티로 출연해 의미를 더했다.

김종태는 가족과 목욕탕에 다녀오다 연행돼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오게 된다. 그날부터 김종태는 이두한을 중심으로 한 고문경찰들로부터 온갖 고문과 거짓진술을 강요당한다. 진실을 거듭 얘기할수록 고문의 수위는 높아진다. 거꾸로 매달아 욕조에 머리를 처박는 일은 시작에 불과하다. 김종태 역의 박원상은 “모 선배는 내 몸을 두고 ‘노비의 몸을 갖고 태어났다’고 할 정도로 체력이 좋은 편이라고 말했다. 촬영을 앞두고 감독에게도 생각을 비우고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어쨌거나 고문을 하는 사람이나 고문을 당하는 사람 모두에게 너무 힘든 작업이지만, 나는 지치지 않은 체력으로 임했다”고 말했다.

정지영 감독과 영화 인연 20년을 자랑하는 이경영은 “시나리오를 봤을 때 대개의 배우들은 캐릭터에 대한 연민으로 접근을 하는데, 오히려 이 시나리오는 영화를 완성해야 한다는 책임감, 그리고 사명감을 끼게 했다”며 “고문하는 장면에서 적당히 하거나, 상대 배우를 염려해 살살 다뤘다면 촬영은 지연됐을 것이다. 일부러 무자비하게 다루려고 노력했는데, 조금 더 세게 했어도 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힘들고 무거웠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남영동1985

故김근태 의원 22일간 고문일기
군부정권시절 폭력 진상 들춰내

철가방 우수씨

기부천사 故김우수씨 추모
파란만장했던 일생 다뤄

돈 크라이 마미

미성년 성폭행사건 바탕
딸 잃은 엄마 처절한 복수극

1970∼80년대 공공연히 자행됐던, 고문 피해자들이 외면당하는 현실과 군부정권 시절 고문에 대한 진실을 잘 알지 못하는 관객에게 ‘남영동1985’는 분명 진실을 알릴 기회가 될 듯하다. 정지영 감독은 “이 작품을 통해 대한민국이 화합과 화해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며, 이런 과오의 과거를 영화를 통해 본 뒤 새로운 현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던지는 질문을 항상 관객들이 공유하길 바라는 영화를 앞으로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 밖에 주목받는 실화영화

‘철가방 우수씨’는 우리 사회 나눔의 메신저가 된 철가방 기부천사인 고 김우수씨 추모 1주기를 맞아 선보이는 작품이다. 1년 전, 고아로 자란 중국집 배달원이 한 달 70만원을 벌며 남몰래 아이들을 도운 사연이 그의 죽음을 계기로 세상에 알려지면서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다. 김우수씨는 고시원 생활을 하면서도 매달 다섯 명의 아이를 후원해 오다가 지난해 9월25일 배달 중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그의 안타까운 사연이 세상에 알려지자 많은 국민은 그의 선행에 크게 감동받으며 끊임없는 추모행렬을 이었다. 영화는 그의 불우했던 유년시절과 세상에 알려진 아름다운 선행, 그리고 안타까운 죽음에 이르기까지 김우수씨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다룬다. 김우수 역은 오랜만에 스크린에 복귀하는 최수종이 맡았다.

딸을 잃은 엄마의 처절한 복수극을 그린 ‘돈 크라이 마미’ 역시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했다. 고등학교에 다니던 딸 은아(남보라 분)가 같은 학교 남학생들로부터 끔찍한 사고를 당하지만, 그들은 미성년자란 이유로 법의 처벌을 받지 않게 된다. 정신적 충격에 시달리던 은아는 결국 자살하고, 혼자 남은 엄마(유선 분)가 딸의 가해자들에게 직접 복수를 가한다는 내용이다. 연출을 맡은 김용한 감독은 성폭행 피해자들의 인터뷰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보던 중 사촌오빠에게 성폭행 당한 뒤 자살을 택한 딸과 그녀의 가족에 대한 사건을 접하고 영화 제작을 결심했다. 피해자와 피해자 가족이 느끼는 슬픔과 분노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영화는 미성년 성폭행 가해자에 대한 엄격한 법적 규제가 없는 현실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도가니’처럼 국민적 관심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하나안’은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를 배경으로 범죄와 마약을 둘러싼 네 친구의 우정과 엇갈린 운명을 사실에 입각해 그린 영화다. 고려인 4세 박루슬란 감독은 자신의 뿌리와 고려인의 역사를 추상적인 역사가 아닌 현재의 우즈베키스탄의 모습과, 자신과 친구들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영화화했다. 특히 주인공 스타쓰를 연기한 스타니슬라브 장은 박루슬란 감독과 오랜 친구 사이로, 부패한 경찰사회에 환멸을 느껴 경찰을 그만둔 뒤 한국으로 건너와 배추농장에서 일하며 강한 삶의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인물. 박루슬란 감독은 스타쓰와 함께 한 남자의 삶의 역정을 진정성 있게 담아 리얼리티의 정수를 뽑아냈다.

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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