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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지막 독립군 박희광 의사의 아들 근용(왼쪽)·정용 형제가 광복70주년을 맞아 대구시 수성구 만촌동 광복회 수성구지회 사무실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
호국의 달이다. 선열의 희생과 헌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 유족에 대해서도 국가가 보듬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2006년 국가보훈처가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총 5천834명의 독립유공자 유족 가운데 학력이 중졸이하인 유족이 3천259명으로 전체의 55.9%에 달한다. 직업이 없는 유족이 3천784명(64.9%)인 반면 봉급생활자는 804명(13.8%)밖에 되지 않는다. 대구·경북의 마지막 독립군이었던 박희광 의사(1901~70) 후손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다.
박 의사는 구미에서 태어나 여덟 살 때 구한말 의병이던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갔다. 그는 목숨을 건 무장독립투쟁을 하다 붙잡혀 안중근 의사가 순직한 뤼순감옥에서 20년간 옥고를 치렀다. 조국 광복을 2년 앞둔 1943년, 천신만고 끝에 출옥한 박 의사는 만주에서 광복을 맞았다. 이후 조국으로 돌아온 박 의사는 김구 선생을 경호했다. 하지만 안두희의 암살행위를 막지 못한 괴로움과 자책감으로 번민하다 낙향했다. 그는 44세 때 결혼을 해 4남1녀를 뒀다. 지난 12일, 박 의사의 장남 근용씨(69·광복회 대구수성구지회장)와 차남 정용씨(65·박희광 선생기념사업회 사무처장) 형제를 만났다.
박 義士, 독립투사 중 최장기 복역수
베풀기 좋아해…전쟁고아 많이 도와
양복수선업 하다 화재난 후 생계곤란
가족 일곱이 방 한 칸에 살았던 적도
형제는 정규교육도 제대로 못받아
근용씨 광복회 수성구지회장으로 봉사
정용씨는 아버지 기념사업 일에 전념
생가복원·기념관건립 남은 생 바칠터
▲박희광 의사는 어떤 분이었나.
“구미 봉곡동은 밀양박씨 집성촌이다. 대대로 사대부가문이었다. 특히 조부(박윤하)는 구한말 의병 출신이다. 안동 내앞 마을 출신 일송 김동삼 선생, 석주 이상룡 등과 함께 장남과 딸 1명만 남겨두고 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가서 항일무장운동을 했다. 선친은 8남매 중 다섯째다. 고종사촌들이 만주에 산다. 선친은 심양 남성자학교를 졸업하고 1922년 상해임시정부 산하 통의부 제5중대원으로 들어가 만철연선(萬鐵沿線)의 친일파 토벌과 매국노 처단을 위해 김광추의 휘하에서 특공대원으로 활약했다. 24년 군자금 징수를 위해 일본요정을 습격하다 일본군경에 체포됐다. 1심에서 사형선고, 2심에선 출생등록을 늦게 하는 바람에 미성년자가 돼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정용)
▲독립군 후손으로서 힘든 삶을 살았다고 들었다. 선친에 대한 기억이 있나.
“초등학교에 다닐 때 3형제가 아버지를 따라 왜관에 있는 옛 삼성극장에서 황해가 주연한 ‘독립군’이란 영화를 봤다. 영화가 끝난 뒤 관객이 흩어지지도 않았는데 아버지께서 감격에 겨워 그 자리에 벌떡 일어서 ‘대한독립만세’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 사람들이 다 쳐다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땐 어린 마음에 무척 창피했다. 선친은 늘 남에게 베풀어주길 좋아했다. 자식이나 가족보다 늘 나라 걱정을 많이 했다. 선친께서 돌아가실 때 빚만 우리에게 3만원 남겼다. 왜관에 살 때 방 1칸에 부모님과 5남매가 같이 살았다. 연탄가스에 중독돼 죽을 뻔했던 기억도 있다.”(근용)
▲박 의사는 독립투사 중 최장기복역수(20년) 3명 가운데 1명이다. 광복 후 김구 선생이 박 의사에게 위로금 2천원을 주었다는데, 당시 집 한 채가 100원 정도였다고 한다.
“김구 선생 서거 후 선친께서 고향으로 칩거했는데 1년 뒤 6·25전쟁이 났다. 전란 중에 피란민이 우리 집에 돈이 있는 것을 알고 많이 찾아와 도움을 청했다고 한다. 그때 선친께서 그들에게 재산을 대부분 나눠 주었다고 들었다. 특히 선친께선 6·25전쟁 고아를 많이 도와 주었다. 선친은 옥중에서 익힌 재봉기술로 대구에 와 교동시장에서 양복수선을 했는데 큰 화재가 나는 바람에 가게를 다 태웠다. 이후 생활고가 컸다.”(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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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희광 의사 |
▲보훈신청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선친께서 김구 선생을 지켜내지 못한 것에 대해 자책을 많이 했다. 이승만 정권 밑에서 훈장을 받는 것에 대해 탐탁지 않아 했을지도 모른다. 생전에 항상 훈장을 받기 위해 독립운동을 한 게 아니다고 말씀하셨다.”(정용)
▲학교 교육을 제대로 받을 수 없었겠다.
“그렇다. 끼니도 잇기 어려운 판에 학교에 가는 건 사치였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고졸검정고시를 거쳐 57세 되던 2007년 영남대 정외과에 입학해 2011년에 졸업했다. 선친의 기념사업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지역 및 복지행정학과를 부전공했다. 형님이 가장 고생을 많이 했다. 어릴 때 찹쌀떡, 아이스케키 장사 등 안 해본 일이 없다. 대학을 졸업할 때 ‘박희광 의사, 조선독립 대한통의부의 특공대원으로서의 투쟁활동’을 주제로 논문을 썼다. 19세 때 칠곡군청 공보실 사진담당으로 특채돼 일을 하다 구미출장소로 파견을 갔다. 출장소로 자원한 건 구미에서 선친의 기념사업을 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사립학교교직원, 의료보험관리공단에서 명예퇴직을 했다.”(정용)
▲박 지회장은 어떻게 살았나.
“어머니께서 산후조리를 잘못하는 바람에 선친보다 4년 먼저 돌아가셔서 24세 때 가장이 됐다. 학교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침산, 중앙, 칠성, 옥산, 칠곡 망정 등 초등학교만 5곳을 다녔다. 지인의 소개로 칠곡군청에 다니다 그만뒀다. 박봉으로 생계를 이어갈 수 없었다. 1968년에 운전면허를 따고 택시, 레미콘, 버스, 트럭 등을 운전했다. 지금은 개인택시를 한다.”
▲박 의사의 흉상이 대구 두류공원 인물동산에 있다. 구미에도 동상이 있는 것으로 안다.
“72년에 선친의 기념사업회가 조직됐다. 이후 12년 만인 84년 광복절을 맞아 구미금오산 도립공원에 선친의 동상을 세웠다. 2011년에 다시 2억9천만원을 들여 6개월 동안 동상을 보수하고 인물군상, 태극문양 화강석 등으로 마감을 했다. 97년엔 두류공원 인물동산에 선친의 흉상을 건립했다. 이 공로로 한국특별 보훈대상을 받았다. 또 민족선양사업회로부터 2001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정용)
▲박 의사의 고향 옛터 생가복원과 추모기념관건립사업은 어떻게 됐나.
“밀양박씨 경주공파 종중 땅 1천983㎡(600평)를 문중에서 기증받고, 또 2013년 3월 국가보훈처로부터 7억원의 국비를 받았다. 당시 같이 7억원을 확보한 경남 함안군은 그곳 출신 손양원 목사의 생가복원과 기념관건립을 지난해 말에 완공했다. 경남도와 함안군 등이 총 52억원을 마련했다고 한다. 하지만 구미시와 경북도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특히 구미시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로 도와주지 않았다. 그 바람에 지난해 말 국비 7억원을 반납하게 됐다.”(정용)
▲속상했겠다. 어떤 연유로 그렇게 됐나.
“한동안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다. 명분상 선친과 같은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장진홍 의사, 권쾌복 지사의 출신지가 칠곡인데 구미시로 편입되면서 형평성 문제가 있다고 했다. 하지만 국비를 받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먼저 건립을 하고 형편이 되면 두 분은 나중에 해도 되지 않는가. 조부께선 전 재산을 임시정부에 헌납하고 만주로 망명했으며, 선친은 독립자금 모집책으로 활동하다 20년간 옥살이를 하다 천우신조로 살아남았다.”(정용)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나.
“182만원의 보훈연금을 받고 있다. 형님께서 30%를 가져가고 나머지는 형제가 나눠쓴다. 형님이 광복회 수성구지회장을 맡고 있는데 쉬는 날이면 이곳에서 봉사를 한다. 무보수 명예직이다. 형님은 운전을 하면서 27년간 교통봉사를 하고 있다. 나는 선친의 기념사업회 일에 전념하고 있다. 나라가 멸망했을 때 온 몸을 던져 구국활동을 한 선열의 피와 땀을 잊어선 안된다. 광복회는 큰집 격인데, 6·25참전전우회나 상인군경회보다 처우가 훨씬 못하다. 선친의 생가와 기념관건립을 위해 남은 생을 바치겠다. 작게는 집안의 일이지만 구미와 대구, 대한민국의 자랑이 아닌가.”(정용)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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