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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건우 <극단 시소 대표> |
요즘은 해가 빨리 저뭅니다. 일에 한참 몰두하다 문득 밖을 보면 오후 5시가 조금 지난 시간인데도 창밖은 벌써 어둑어둑합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거리도 찬바람에 옷깃을 여민 채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의 풍경으로 스산해서 나도 모를 한기로 몸을 부르르 떨게 됩니다.
어느새 한 해가 저물어갑니다. 괜히 이 시기가 되면 맘부터 조급해집니다. 행여 놓치는 일이나 정리 못한 일이 있지 않을까 고민할 겨를 없이, 약속이 많아지고 챙겨야 할 일들이 많아집니다. 다이어리를 정리할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각오하고 오후 내내 다이어리를 꺼내놓고 첫 장부터 차곡차곡 넘기며 지난 한 해를 살펴보았습니다. 공연을 계획하며 상세하게 적어놓은 메모와 낙서, 소재가 생각날 때마다 급하게 적어 놓은 희곡의 줄거리, 주위 동료나 친구들과의 소소하지만 잊지 말고 꼭 기억해야 될 에피소드, 아들과 딸에게 한 약속과 좀 더 크면 해줄 충고, 각종 수입과 지출, 채무와 상환 내역, 달마다 날마다 숨 가쁘게 메모된 스케줄, 그리고 다이어리의 첫 장에 꽤 크고 굵은 글씨로 순위를 매겨 둔 새로운 일 년을 시작할 때 각오한 목표들….
막상 찬찬히 들여다보니 지난 열두 달 동안 나름대로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바삐 살아온 듯 보였습니다. 결과는 목표의 딱 반. 5할 이상이 계획한 대로 됐습니다. 그런데 비교적 맘만 먹으면 할 수 있었던 신변잡기의 계획들은 지키지 못한 반면, 계획을 세울 때 다소 무리라고 생각했던 목표들을 이룬 것이 흥미로웠습니다. 열 작품 이상에 참여하고자 한 계획을 탈 없이 해냈고, 무더웠던 여름 대구, 거창, 밀양 세 곳을 강행군하며 연극제에 참여하려 한 계획 또한 무탈하게 마무리한 데다가 거창국제연극제에선 직접 쓴 희곡으로 작품대상과 연출상까지 받은 성과가 있었습니다.
다이어리를 덮으며 다이어리 속 글자에서 메모할 당시의 즐거움과 기쁨, 깊은 고민과 갈등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중요한 결정에 도달했습니다. 한 해 동안 열심히 살아온 나에게 칭찬을 아끼지 말고, 술 한 잔 사주어야겠다고 말입니다. 누군가의 성과를 부러워하거나 비방하거나 배 아파할 겨를 따위는 없이, 술 한 잔 마시고 다시 털고 일어나 더 열심히 삶을 계획하고 진행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연극을 잘해야겠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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