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여백에 메모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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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1-18  |  수정 2016-01-18 08:05  |  발행일 2016-01-18 제22면
[문화산책] 여백에 메모하기

빌 게이츠가 파워블로거가 되었단다. 이미 소문난 독서광이지만, 이번엔 읽은 책과 서평을 블로그에 실어 세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전부터 게이츠는, 책의 여백에 적어 둔 감상을 지인들에게 보내곤 했다 한다. 그러다가, 그 내용을 대중과도 공유하면 재밌을 것 같아 포스팅을 시작하게 됐다고.

그의 독서 습관도 재밌다. 전자책을 피하고 종이책을 읽는단다. 전자책으로 폼 나게 독서할 줄 알았더니만, 책만은 ‘구식’을 고수한다네. 게이츠가 총애하는 ‘구식’ 책이 대체 무얼까.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일 테다. 낱장 여럿을 묶어 표지를 씌운, 그래서 양면에 기록된 글을 한 장씩 넘겨가며 읽도록 만든 책. 이런 책을 ‘코덱스’라고 부른다.

코덱스 등장 이전 아주 옛날에는 ‘두루마리(scroll)’가 대세였다. 두루마리는 한쪽 면만 쓸 수 있고, 특정 부분을 찾으려면 하염없이 펼쳐야 했다. 두루마리의 이런 단점을 보완한 발명품이 코덱스다. 번호를 매길 수 있고, 페이지를 건너뛰기 용이하다. 접거나 책갈피로 표시하기 쉽다. 게이츠처럼 읽다가 떠오르는 생각을 여백에 써놓을 수도 있다. 이게 ‘구식’ 코덱스가 ‘더 구식’ 두루마리를 제치고 2천 년 가까이 사랑받은 이유다.

그런데 요즘 ‘신식’ 전자책들을 보면 두루마리가 귀환한 듯하다. 컴퓨터나 스마트폰은, 세로 방향 두루마리의 디지털 버전이다. 마우스나 손가락으로 ‘스크롤’하며 화면을 들여다보는 현대인과, ‘에헴’ 하며 두루마리를 펼쳐 든 사극 속 인물이 오십보백보라면 삐치시려나.

구식, 신식을 따지려는 게 아니다. 종이책이냐 전자책이냐, 편 가르고 싶지도 않다. 관건은, 책의 형식이 능동적인 독서를 보장하는지의 여부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의 여백은 글만큼 중요하다. 독자들의 다양한 주석이 달릴, 책 속 장치이기 때문이다. 여백은, 저자도 예측 못할 무궁무진한 가능성이 잠재된 공간이다.

냉철한 기업가에서 자선사업가로 인생행로를 업그레이드한 게이츠. 여기에는 아내 멀린다와 워런 버핏의 영향이 컸다고들 한다. 한 가지만 더해 볼까, 여백에 메모하는 독서법이라고. 저자의 주장에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확장하는 글 읽기. 작가가 제시하는 정답 대신 또 다른 해결책을 모색하는 책 읽기.

문득 떠오르는 장면 하나. 아이들이 밑줄을 긋는다. 중요하다는 곳엔 별표도 친다. 여백에, 불러주는 정답을 받아 적는다.
김영해 <계명대 시각디자인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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