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네스코가 제정한 ‘세계 책의 날’을 맞아, 대구 중구청에서 주관하는 ‘책 나누기, 행복 더하기’ 행사에 참여했다. 필자는 ‘젊은 시인과 맛있는 시 읽기’란 주제로 시민들과 만났다. 자리에 앉자마자 여성 두 분이 다가왔다. 젊은 시인을 구경하고 싶어 친구와 함께 오셨단다. ‘구경’이란 말이 웃기고도 슬펐다. 어떻게 하다가 젊은 시인은 구경해야 할 정도로 희귀한 종족(?)이 되었을까. 이런 지경에 이른 것은 시인의 잘못일까, 시민의 잘못일까.
젊은 남성 한 분도 오셨다. 요즘 시가 너무 어렵다며, SNS에서 활동하는 하상욱씨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질문에 곁들여 섭외할 일이 있어, 하상욱씨 매니저와 겨우 연락이 닿았는데 섭외비가 200만원 이상이라 포기했단다. 질문에 답하기 참 민망한 순간이 되고 말았다. 필자는 지극히 주관적인 견해임을 밝히며,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그는 시인이 아니라고 했다. 이유인 즉슨 시는 함의(含意)를 지니고 있어야 하며, 똑같은 시라고 할지라도 누가 읽느냐에 따라 감흥이 달라야 한다고 본다. 누가 언제 어디서 읽든, 느끼는 바가 똑같다면 시라고 할 수 없다. 여기 전화기가 있다고 치자. 전화기를 보면 전화하는 것 외에 따로 떠올릴 기능이 없다. 그냥 사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좋은 시는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기분으로 읽든, 진한 여운을 준다. 심지어 똑같은 시라도 읽는 이의 감정에 따라 그 의미가 달리 읽히기도 한다. 소위 ‘실험시’ ‘해체시’가 20년 가까이 문단의 주류로 있는 동안, 독자들은 그만큼 멀어졌다. ‘SNS 시인’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때가 이와 맞물려 있다. 독자가 어려움을 토로할 때, 가벼운 글쓰기로 그 통증을 어루만져주었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SNS 시인’은 분명 독자층 양적 확대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 그럼에도 우려스러운 일은 이렇다 할 문학적 성과가 없는데 이들의 놀이가 마치 문학인 양 여겨지는 분위기이다. 이는 장기적으로 한국 문학의 비극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시가 아닌 것이 마치 시인양 주류가 되면, 어쩌면 지금보다도 더 시인을 구경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시인의 생계 또한 지금보다 더 장담키 어려울 것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 무엇이든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이 낫다. 시민이 시인을, 아니면 시인이 시민을 보호해야 하는 것인지 이래저래 참으로 난망한 요즘이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문화산책] 시인보호구역](https://www.yeongnam.com/mnt/file/201604/20160427.010230750450001i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