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차표 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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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7-21  |  수정 2016-07-21 08:08  |  발행일 2016-07-21 제23면
[문화산책] 차표 한장
이윤경 <성악가>

나는 내성적이다. 나를 아는 사람들은 아무도 안 믿겠지만 무척이나 소심하고 낯을 가린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내성적이고 조용함, 책읽기를 좋아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음, 한 친구를 깊이 사귐. 뭐 이런 말들로 초등학교시절 생활기록부는 채워져 있다. 5학년2학기에 전학갔을 때 합창부 특별활동을 하겠다고 손들었더니 아이들이 놀라며 “쟤 벙어리 아니었어?” 했다. 어쩐지 밥숟가락 떠먹는 시늉을 연신 해대며 큰소리로 또박또박 “도시락 같이 먹을래” 하더라니.

성악을 시작하고 성격은 많이 밝아졌지만 타고난 성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 것 같다. 지금도 목 아낀다는 핑계로 사람들 모이는 곳엔 발을 들이지 않으니 말이다. 2004년 봄 로마에 도착해 짐을 풀고 바로 다음날이었나? 학생들이 쓰는 한달 정액승차권을 사러 지하철역 근처로 나갔다. ‘30유로짜리 한달권 한 장’ 길지도 않은 이 말을 달달 외고도 불안해 종이에 적어 손에 꼭 쥐고. 큰길가에 나가자 바로 담배와 신문, 승차권을 파는 가게가 있었다.

어둡고 조그마한 승차권 판매소 안에서 담배를 피우며 아들처럼 보이는 남자에게 뭐라뭐라 소리를 지르고 있는 코끼리 다리 아줌마를 본 순간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지금 당장 나가지 않으면 이 길로 잡혀 마피아에게 끌려갈 것만 같았다. 빛의 속도로 돌아 나와 주위를 살폈는데, 슬쩍 보니 두어 개쯤 승차권 판매소 간판이 보였다. 심호흡을 한 후 메모지를 손에 꼭 쥐고 걷기 시작했다. 긴 싸움이 될 게 분명했다. 다른 손님이 있으면 있어서 못 샀고, 없으면 무서워서 돌아 나왔다.

가슴에도, 앞 다리에도 털이 많은 남자와는 도저히 마주볼 수가 없었고 파란색 눈 화장을 한 여자는 아무래도 내 말을 못 알아듣는 척할 것 같았다. 중간에 착해 보이는 젊은 남자를 만나 드디어 살 수 있으려나 했건만, 그 인간은 내게 휴대폰 번호를 물었고, 나는 도리도리와 바이바이를 동시에 하며 뒷걸음질 쳤다. 결국 나는 다섯 개의 지하철역을 지나 종점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길에 겨우 승차권을 샀다. 수십 개 판매소를 지나 착해 보이는 할머니 가게에 골라 들어가서.

그때 처음 산 승차권에 내 이름을 눌러 적으며 생각했다. 나중에 죽을 때 내 무덤가에 같이 묻어 달라고 할까? 손에 꼭 쥐었던 너덜너덜한 메모와 함께. 낯가림이 심한 나의 유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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