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이윤경 <성악가> |
얼마 전 일본에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일본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해야 할지 점잖게 다퉜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독도 문제며 위안부 문제도 솔직히 우리가 안 봤으니 사실이 어땠는지 아무도 모르는 일을 가지고 왜 그리 싸워 대느냐. 사실 일본 국민들은 잘 모른다. 관심도 없다. 좀 친하게 지내면 좋을텐데, 한국이 뭘 어떻게 해 달라는 건지 모르겠다”라며 정말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는 그분께 말씀드렸다.
“죄 없는 내 할머니는 경찰만 보면 순사는 무서운 거라며 고개를 푹 숙이고, 어린 나를 품에 꼭 안고 도망 가곤 하셨지요. 일본말로 ‘쌀을 달라’고 말하지 않으면 쌀을 살 수 없었으며, 내 나라 말을 쓰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던 슬픈 시기가 우리 땅에 있었고, 그것이 일본 때문이었다는 것을 알아 달라는 겁니다. 그뿐이에요.” 눈을 크게 뜨며 그분이 말하였다. “정말로 그랬냐”고.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잠시뿐일 것이다. 이내 창밖을 보며 “와, 벌써 부산이다. 빌딩 많다”라며 일행들과 재잘거렸으니까.
10년쯤 전, 이탈리아 토레 델 라고(Torre del lago)에서 열리는 푸치니 페스티벌에 간 적이 있다. 그날 공연은 현대물로 ‘나비부인’의 후속편이라는데, 죽은 나비부인의 아이가 자라 2차 세계대전을 맞이한다는 일본인 작곡자의 작품이란다. 세 시간을 가득 채운 일본 전통가락, 악의 상징인 성조기, 미군의 폭격으로 짓밟힌 땅을 보며 자아를 찾아가는 초초의 딸.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인 일본은 온데간데없고 고고한 학처럼 묘사된 ‘역사의 피해자 일본인’만 있었다. 놀라웠다. 도가 넘은 역사 왜곡을 토대로 한 작품을 세계적인 오페라 무대에 올려 만방에 알리다니. 부러웠다. 나라가 힘이 세고 돈이 많으니 문화로 역사인식을 바꾸기도 하는구나 싶어 분하고 억울했다.
처음으로 힘 있는 성악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옆자리의 어르신과 다퉈봐야 소용없다. 예술인은 예술로 말해야 한다. ‘대구의 힘은 예술이다!’라는 대구예총의 구호를 좋아한다. 한국의 힘도 예술이 아닐까. 6·25전쟁 이후 북한보다도 가난하던 대한민국에서 얼마나 훌륭한 예술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나. 한국 예술인, 혹은 한국 문화가 세계를 지배한다면 어쩌면 광복만큼이나 좋은 날이 앞으로 오지 않을까. 유명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난 이미 늦은 것 같고 후배들은 꿈을 크게 가지길 기대해 본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