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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원 <피앤씨 갤러리 아트디렉터> |
한동안 여행을 다니면 기념으로 책을 한 권씩 샀다. 여행의 조그만 낙이라며 이책 저책 사다보면 가방은 가방대로 무거워진다. 여행에서 돌아와 다 읽지 못하고 쌓여가는 책을 보면 마음도 무거워진다. 책을 읽는 것은 좋지만 한편으로는 이도 조금 허영이란 생각이 들기 시작해서 언젠가부터 조금 자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최근 가족과 함께 런던을 가게 되었는데 어쩌다보니 또 중고책방을 가게 됐다. 정신을 잃고 눈을 반짝거리며 무언가 괜찮은 게 있을까 서가에 코를 박고 들여다보는 내 모습을 생각하니 우습다. 그렇게 발견한 이번 여행의 전리품은 ‘튜더가의 역사’와 ‘영국 해양전쟁사’다.
사람마다 책을 읽는 습관도 다르다. 나의 경우 예전에 밑줄 치며 읽은 책을 다시 읽을 때면 독서가 불편해지는 경우가 있다. 밑줄은 균등하던 텍스트 사이에서 문장을 선언적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현재의 나의 의식은 따라가던 어감을 상실해버린다. 그것은 마치 머릿속에서 기분좋은 볼륨으로 잘 맞춰 놓은 라디오를 듣고 있는데 갑자기 볼륨이 폭발하면서 말썽을 부리는 고장난 라디오와 씨름하는 것과 같다. 놀란 가슴을 진정하고 다시 원래의 다이얼을 애써 맞추어 집중하고 있노라면 또다시 독재자의 외침같은 선언들은 잠잠하던 머릿속을 온통 장악해버린다. 머릿속은 이제 더이상 조용한 사색의 공간이 아니다. 메모 또한 귀찮은 훼방꾼이다. 같은 책을 읽어도 나의 사색은 예전의 그것과 다른데 그것이 아무리 나 자신의 메모라 할지라도 과거의 흔적은 현재의 사색에는 방해만 되는 주변 채널이다. 그래서 나는 책을 읽을 때 마음에 드는 문장이나 구절을 공책에 따로 적으면서 읽는 습관이 생겼다.
그러나 난처한 머릿속 처지를 모르는 손은 내게 좀더 직접적인 경험을 요구한다. 성마르게 형광펜을 찾고 볼펜을 요구한다. 그들의 집착은 대단하다. 이해가 안 되는 것도 아니다. 행간을 따라가는 사각하고 재미진 줄 긋기. 인쇄된 텍스트와 흰 종이의 까실한 질감 위를 단호하게 줄을 긋는 자랑스러움, 그의 능숙함, 속도, 나의 번뜩이는 지성이 발견한 아름다운 선언들, 그리고 방금 남겨진 신선한 선들!
나는 신경질적인 내 머리의 짜증이 겁이 나 눈과 손에게 10여년 줄긋기의 즐거움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 근래 문득 펑펑 줄을 긋고 싶은 욕구가 고개를 들고 있다. 아직은 머리가 냉정히 거절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처음서부터 끝까지 줄 긋기만으로 책 한 권을 통째로 훑어 버리고 싶다. 까탈스러운 머리가 한 번쯤은 너그러이 눈감아주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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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책 읽기](https://www.yeongnam.com/mnt/file/201608/20160812.010180748050001i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