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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지원 <피앤씨 갤러리 아트디렉터> |
모든 일에는 기승전결이 있다. 올여름은 폭염 때문에 모두에게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지난 며칠 동안 밤공기의 미묘한 차이는 그저 나의 착각일까. 가을. 울림만으로도 가슴 서늘해지는 계절이 오고 있다.
밤 한가운데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여기가 어디인지 소스라치는 잠깐의 순간 뒤에 나의 의식을 현실로 불러들인 것은 방 한편의 어둡고 검은 그림자, 그것은 나의 검은 피아노였다. 순하고 충성스러운 네발 동물처럼 우두커니 내 곁을 지키는 나의 가디언.
어둠 속에서 나는 예상치 않게 획득한 나만의 시공간을 만끽한다. 가라앉은 밤의 공기. 그것은 시각에게 간섭당하는 편견과 혼돈 없이 사물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게 하는 의외의 순간이다. 사물들은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충직한 친구들이며 창밖 멀리 보이는 산의 그림자와 밤안개는 우리로 하여금 다시 한번 우주의 광활함을 깨닫게 한다. 어둠 속에서 더욱 아름다운 검은 그림자들은 그것이 나와 함께 거기 존재한다는 탄탄한 안도감을 준다.
어둠은 또한 우리의 의식 깊숙한 곳과도 닮아 있다. 수천 겹의 검은 레이어가, 눈을 감으면 만화경처럼 펼쳐진다. 때로는, 달도 없는 밤하늘의 그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은 환함보다 더 명료한 의식의 고양을 일으킨다.
나는 나를 둘러싼 어둠의 세계를 뒤로하고 다시 잠을 청하려 눈을 감았다. 감은 눈앞에 또 다른 검정의 세계가 펼쳐졌다. 눈앞을 번뜩이는 검정의 획들. 그것은 빛의 환영인가. 아니면 멀리서 들려오는 어떤 소리의 형상인 것 같기도 하다. 광활한 검정 속에서 번뜩이던 검은 빛들이 점점 눈앞으로 다가온다.
불을 향해 달려드는 나방들처럼 어지럽게 튕긴다. 온몸이 떨리도록 찬란한 울림을 들려주던 다음 순간 재빠른 섬광처럼 조각조각 흩어져 꽃잎처럼 날아간다. 이것은 아마도 나의 검은 가디언이 내게 보여주고 싶었던 꿈인지도 모르겠다. 그는 행여 오래전 그 주인이 끄적거리던 미완의 곡이 언젠가는 다시 완성되기를 바라며 살며시 옛날 옛적의 그 소리를 혼자 연주해 본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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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가을 밤](https://www.yeongnam.com/mnt/file/201608/20160826.010160745170001i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