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연필 깎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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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8-31  |  수정 2016-08-31 09:27  |  발행일 2016-08-31 제23면
홍영숙 <시인>
홍영숙 <시인>

아침 바람이 한결 시원해졌다. 집 안에 있던 화분들을 베란다로 옳기고 분무호스를 켠다. 흠뻑 젖은 잎사귀들이 푸르게 웃는다. 얼음을 듬뿍 넣은 커피를 들고 책상에 앉았다. 컴퓨터 전원을 누르고 연필꽂이에서 심이 가장 뾰족한 연필을 고른다. 책상에 앉으면 연필부터 빼어드는 건 내 오랜 습관이다. 고쳐 쓸 때 흔적 없이 깔끔해서 연필로 쓰기를 좋아한다. 눈으로 또는 귀로 먼저 읽은 문장을 받아 적을 경우 가끔 손보다 의식이 앞서갈 때가 있다. 손은 보고 들은 것보다 의식이 시키는 일을 우선한다. 그럴 때마다 쉽게 지우거나 수정할 수 있는 필기구는 연필뿐이다. 또 금방 깎은 연필로 메모를 할 때의 그 기분은 참 남다르다. 백지 위에 써내려가는 연필 글씨에서는 서걱서걱 마른 낙엽 스치는 소리가 나고, 그 문장은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하얀 눈밭 위에 남겨진 발자국처럼 선명해 보일 때가 있다. 특히 지금 막 떠오른 문장 하나를 서둘러 옮겨 적을 때 더욱 그렇다.

연필을 쓰기 위해서는 깎는 수고도 필요하다. 저녁을 먹고 나면 숙제하는 우리 옆에서 아버지는 연필을 깎아 주셨다. 미세하게 풍겨오는 나무 향기를 따라 연필 깎는 아버지의 손길을 넋놓고 바라보다 걱정을 들은 적도 많다. 어린 내 눈에 아버지의 연필 깎는 솜씨는 최고였고 그런 아버지의 모습이 참 좋았던 것 같다. 딸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연필을 쓰기 시작하면서 연필깎이를 사용했는데 어느 날 문득 아버지의 연필이 생각났다. 그날 저녁, 바닥에 신문을 펼쳐놓고 연필을 깎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아이의 필통 속에 있는 서너 자루의 연필이었는데 다듬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연필은 점점 짧아져, 난감해진 나는 결국 새 연필까지 꺼내 와 깎게 됐다. 연필마다 나뭇결이 다르고 힘 조절이 서툴러 칼을 가져다 대기만 해도 푹푹 잘려나가는가 하면 연필심은 곧지 않고 울퉁불퉁했다. 겨우 마음에 드는 모양새를 갖추어간다 싶을 때에야 엄지손가락이 나무 사이로 칼을 밀고 갈 때의 느낌이 전해졌다.

나무가 동글동글 말리며 얇게 깎여나갈 때, 칼날의 금속성이 연필심을 살짝살짝 스칠 때의 묘한 쾌감이 연필을 잡게 한 또 하나의 이유였던지도 모르겠다. 9월이 가까워오면서 날씨가 제법 가을을 닮아간다. 하늘은 한층 높아지고 창밖엔 밤벌레들이 화음을 고르는 듯 정겹다. 바야흐로 잠들기에 아까운 밤이 오고 있다. 미리 읽을 책과 새 메모장을 마련하고 슬슬 연필을 다듬어 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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