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길 속에 스며든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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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11-24  |  수정 2016-11-24 08:02  |  발행일 2016-11-24 제22면
[문화산책] 길 속에 스며든 이야기
이정호 <국악작곡가>

곡을 쓰다 보면 쉽게 잘 풀리는 곡이 있는 반면 아무리 오래 잡고 있어도 한마디도 못 나가는 곡이 있습니다. 쉽게 잘 풀릴 때는 음악이 저에게 길을 인도하며 극대화된 집중력으로 마치 음악과 저의 정신만이 존재하듯 오선보에 음표가 빠르게 자리 잡습니다. 하지만 긴 시간 동안 곡을 만들어 나가지 못할 경우엔 아주 큰 자괴감과 외로움, 공허함, 답답함 등 깊은 고통이 뒤따릅니다. 물론 어두운 긴 터널을 지나고 지나 마침내 완성된 악보를 보며 머릿속 또 다른 차원의 ‘상상공간’에서 제가 원하던 음악이 흐르는 그때의 ‘고귀한 카타르시스’는 이루 말할 수 없지만….

며칠 전 곡을 쓰다가 또다시 그 깊은 터널에 빠지게 된 적이 있습니다. 그 답답함이 저를 무작정 밖으로 이끌었고, 혼자 길거리의 네온사인들을 보며 걷다가 이르게 된 곳은 계산성당과 그 맞은 편 3·1만세운동길, 청라언덕이 있는 대구 근대골목이었습니다. 대구 출신 작곡가 박태준의 ‘동무생각’에 나오는 그 청라언덕입니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백합화는 그가 흠모했던 신명학교 여학생이라고 합니다. 사랑이 가득 담긴 청라언덕 옆에는 신명학교와 계성학교 학생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나온 3·1만세운동길이 있는데, 무엇보다 그 길 초입에 있는 아파트 단지를 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곳은 1900년대 대구 갑부였던 장길상씨의 99칸 집이 있던 곳인데, 작년에 근대골목을 주제로 음악을 발표하는 국악밴드 ‘나릿’의 위촉을 받아 쓴 ‘비련의 곡’은 그 장길상의 아들 장병천과 평양기생 강명화의 슬픈 사랑을 주제로 하였습니다. 갑부의 아들과 기생. 큰 신분 차이에도 불구하고 깊은 사랑을 나누고, 끝내는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목숨을 바친 강명화와 그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그녀를 뒤따라간 장병천. 당시 유명한 신여성이었던 나혜석은 강명화를 장사지내던 날 신문에 그녀의 유언을 서두에 인용하며 애석해하는 글을 실었다고 합니다.

“나는 결코 당신을 떠나선 살 수가 없는데, 당신은 나와 살면 가족도 세상도 모두 당신을 외면합니다. 그러니 사랑을 위해 그리고 당신을 위해 내 한 목숨을 끊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이 가을이 다 지나가기 전 근대골목을 말 그대로 ‘문화산책’하며 그 시대를 살아갔던 많은 이들의 사랑과 꿈, 추억, 열정을 느껴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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