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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영옥 <미술평론가> |
전화가 없던 시절, 어머니의 편지는 매번 ‘어머님 전상서’로 시작됐다. 외할머니가 받아볼 편지 첫머리 말이다. 눈이 침침해진 어머니의 말을 받아 적어줄 때면 “전 상서’ 인지 ‘전상서’인지가 헷갈리곤 했다. 문명에 길들여진 세대의 습성이다. 반면 어머니 손에 당도한 외할머니의 답장은 띄어쓰기는 물론 맞춤법이 깡그리 무시됐다.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을 모두 겪느라 학교에 갈 수 없었던 세대의 비애다. 안타까워 하던 외할아버지는 벽에다 ‘가 갸 거 겨…’를 손수 써 붙여놓고 밤마다 외할머니의 문맹을 깨우쳐주셨다고 한다. 이젠 고인이 된 노부부의 잔잔한 애정과 모녀의 극진한 정이 선연하다.
며칠 전 ‘퇴근길 인문학-북성로에서 만나요’에서 외할머니의 편지글과 비슷한 시를 만났다. 잠시 잊고 살았는데 새록새록 옛날이 다시 떠올랐다. 칠곡 할머니들이 지은 시는 진솔했다. 직접 대면하진 않았지만 시 속엔 그들만의 삶이 고스란히 있었다. 참석자 모두가 외할머니와 어머니를 만난 듯 반가워 했다. ‘위기지학의 글쓰기’를 강연한 시인이 할머니들의 시화 한 점씩을 선물했고, 그 선물이 강의의 핵심임을 눈치 챘다. 세상을 온전히 받아쓸 수만 있어도 진정한 시인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을 하며 건넨 시, 한 할머니의 진솔한 성찰은 이랬다. “눈 뜨면 부석에 불 넣고/ 숫이대만 끄잡아 내고/ 고기 찌지고 밥하고/ 일평생/ 영감 위해서/ 가시개로 쫑쫑 고기 썰고/ 새벽밥 힘에 부친다/ 그래도 내 영감/ 곁에 있으마 좋다.”
척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삶을 받아 쓴 시였다. 보고 또 봐도 향기롭다. 인생의 잡다한 국면에 대한 진솔한 받아쓰기는 비단 시에만 국한될까. “우리는 별에 갈 수 없지만 별을 향해 갈 수는 있다. 거룩해지려면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한다. 칼끝은 자기에게 겨누어야 하고 자기가 망가지지 않고는 기쁨과 위안을 줄 수 없다. 악과 선보다 더 나쁜 것이 위악과 위선이며 진짜 진실은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다. 토사물도 물기가 빠지면 추하지 않고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곳에서는 볼 수 없다. 무릉에 있어야 도원을 볼 수 있고 머리로 쓰는 글은 세수 안하고 분 바르는 것과 같다.” 강연장에서 빼곡하게 받아 적었던 시인의 말이다.
몸에 힘을 빼고 고양된 정신을 받아쓴 휑한 세한도처럼, 구불구불한 클레의 세련되지 않은 선묘처럼, 모자란 듯 진솔하고 고귀한 예술적 지향은 모든 예술가의 꿈 아닐까. 그 길이 아득하고 멀어 다시 한 발짝 후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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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받아쓰기](https://www.yeongnam.com/mnt/file/201611/20161128.010220802170001i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