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끝까지 우겨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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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1-19 08:06  |  수정 2017-01-19 08:06  |  발행일 2017-01-19 제23면
[문화산책] 끝까지 우겨야 하나
전태현 <성악가>

독일 뉘른베르크 국립극장 전속 솔리스트로 활동할 때의 일이다. 언제나처럼 전날 저녁에 나오는 당일 스케줄 표를 찬찬히 확인하며 부스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웠다.

우선 저녁엔 ‘라 트라비아타’ 공연이 있고, 오전 10시엔 극장에서 반주자와 ‘카르멘’ 음악 연습, 11시부터는 2주 후에 공연될 ‘오셀로’ 연출 연습이 잡혔다. 스케줄 표대로 10시에 음악연습을 시작하였고 반주자와 연습에 매진하다 시계를 잠시 보았는데 벌써 10시50분이었다. 11시에 잡힌 연출 연습은 극장서 15분가량 떨어져 있는 연습실에서 진행된다. 반주자와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바로 연습실로 달려갔다. 공연 막바지라 연출자가 많이 예민하다는 소식을 들은 나의 입술은 더욱 타들어갔다.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전력질주, 11시5분에 연습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예상한 대로 다들 날 기다리고 있었고 깊게 꼬여있던 팔을 풀며 연출자는 내게 소리쳤다.

“태현! 이건 말도 안 되는 짓이야! 우린 5분 동안 아무것도 못한 채 너만 기다렸어!"

늦어서 미안하다고 얘기하며 연습 시작을 유도했다. 하지만 연출자는 흥분을 좀처럼 가라앉히지 못했고 같은 맥락의 말을 되풀이하며 격앙된 목소리로 나를 계속 쏘아붙였다. 나도 더 이상은 참지 못해 나도 모르게 연출자에게 소리쳤다.

“음악연습 마치고 바로 달려온 게 이 시간이야! 나도 어쩔 수 없었어!"

연출자는 깜짝 놀라며 연습 스케줄 표를 확인하고는 내게 말했다.

“태현. 정말 미안해. 연출 연습 전에 다른 연습이 있는 줄 몰랐어. 소리 질러서 미안해. 내가 연습 분위기를 망쳤지만, 우리 기분 좋게 연습을 시작해 보자."

내게 소리지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오히려 웃으며 나를 다독였다. 연출자는 연습이 끝나고 또 한 번 내게 용서를 구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독일 생활을 다년간 하고 있었지만 정말 이해할 수 없는 문화 충격이었다. 금방까지 날 죽일 듯 소리치다 오해했다는 사실을 알자 바로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용서를 구하다니. 만약 반대로 내가 연출자의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 이유야 어찌됐든 늦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계속 몰아세우지 않았을까 싶다.

조용할 날 없는 시국이다. 우리 모두에게 지금 필요한 건 진실된 반성과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용기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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