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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다솜<프로젝트 극단 청춘무대 대표> |
‘태초의 모습은 어땠을까?’ 호기심 많은 인간은 상상력을 발휘한다. 동양 신화 속 등장하는 혼돈의 신 ‘제강(帝江)’은 코끼리를 연상시키는 몸통에 얼굴은 없고 여섯 개의 다리와 네 개의 날개를 가졌다.
그는 얼굴이 없어 천지가 분간이 안 가는 그야말로 깜깜한 혼돈 속에 살았다. 답답하진 않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제강은 춤과 노래를 즐길 줄 알았다. 풍류를 아는 그에겐 절친한 두 친구가 있었다. 각각 남쪽 바다와 북쪽 바다를 다스리는 신 ‘숙(潚)’과 ‘홀(忽)’이다. 얼굴이 없어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제강을 안타깝게 여긴 두 친구는 그의 몸통에 총 일곱 개의 구멍을 하루에 하나씩 정성스럽게 뚫어주었다.
일곱 개의 구멍이 뚫린 혼돈의 신 제강은 과연 어떻게 됐을까. 친구들의 의도와는 달리 제강은 죽어버렸다. 하지만 실망하기엔 이르다. 혼돈의 신 제강이 죽자 눈, 코, 입, 귀 일곱 개의 구멍이 뚫린 얼굴을 가진 인간이 생겨났다.
신화학자 정재서 교수의 해석을 살펴보자. ‘숙’과 ‘홀’의 한자어를 풀이하면 ‘잠깐’ ‘순간’을 뜻하므로 ‘시간’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혼돈의 신이 시간을 상징하는 ‘숙’과 ‘홀’에게 죽임을 당한 것은 비로소 혼돈의 시대가 저물고, 시간과 인간이 지배하는 역사의 시대로 새롭게 접어들었다고 본다.
우리는 카오스에서 코스모스로 진입하는 과정을 상상력으로 풀어낸 재밌는 신화를 읽어보았다. 혼돈의 신 제강은 인간이 지닌 창조적 특성에 대한 정말 탁월한 비유다. 인간을 제강의 후예라고 본다면, 문제 상황을 마주했을 때 창조의 힘을 발휘하여 극복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인간은 눈먼 욕망의 발명품 ‘전쟁’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또다시 ‘혼돈’을 마주한다.
화려한 물질문명을 이룩한 인간은 1·2차 세계대전 이후 무자비한 폭력 속에서 커다란 상실을 경험하고 방황하게 된다. 폐허가 되어버린 나라에서도 연극예술가들은 굴하지 않고, 합리주의가 무너져내리는 무질서한 세계를 반영한 부조리극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기승전결 구조의 일정한 줄거리 없이 무의미한 행동의 반복, 등장인물 성격의 몰개성화, 소통의 부재에 따른 소외와 고독, 공포심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연극예술가들은 부조리극을 창조하여 삶의 희망을 잃고 허무주의에 사로잡혀 표류하는 자들을 위로했다.
중국 현대미술의 거장 쉬 빙이 젊은 예술가에게 쓴 편지엔 이렇게 쓰여있다. “문제가 있는 곳에 예술이 있습니다. 당신이 처한 곤경은 예술적 창의의 원천입니다.” 오늘날에도 혼돈으로부터 오는 창조의 힘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본다.이다솜<프로젝트 극단 청춘무대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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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혼돈에서 태어난 창조](https://www.yeongnam.com/mnt/file/201901/20190125.010160754220001i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