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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하룡<극단 삼산이수 대표> |
현대를 창조와 융합의 시대라고 말한다. 굳이 분류하자면 창조는 낯섦, 융합은 뒤섞임의 영역에 속한다. 따지고 보면 낯섦과 뒤섞임은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같음과 다름의 반복이 빚어낸 결과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시도를 즐기는 부류가 바로 예술인이다. 끊임없는 낯섦의 도전을 추구하는 것이 예술의 본성이니까 말이다. 예술의 속성상 익숙함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다. 여기서 거부감이란 저항의 의미도 포함한다. 익숙함에 대한 저항! 그것은 창작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구속하는 제도적 틀 안에서 살아 꿈틀댄다.
우리나라 예술의 제도는 시대가 진화할수록 더욱 세밀한 구속사유가 등장한다. 옭아맬 대로 옭아매고 그 안에서 자유를 누리라는 것이 바로 우리나라의 예술제도다. ‘관’의 관리 하에 있는 예술은 더욱 그러하다. 우리 안에 가둬놓고 자유로운 창작을 기대하는 것은 역설이다. ‘자유’를 구속하는 이유도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처럼 고무줄 널뛰기하듯 바뀐다.
예술의 자유랍시고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은 장식에 불과한 지 오래다. 문재인정권 역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청산과 함께 팔길이 원칙을 문화예술 기본정책으로 공언했지만 별반 나아진 게 없어 보인다. 여전히 서류, 공연, 정산 등으로 간섭할 뿐 아니라, 공연장 환경도 안전에 떠밀려 제한 사유가 강화되고 있는 추세다. 창작지원, 순회사업 등 도처에 ‘간섭할 수 있는 장치’가 촘촘하게 깔려 있다.
시장에 맡겨둘 때보다 정부가 지원하면 예술이 더욱 잘 발전할 수 있다고 역설한 인물은 영국의 경제학자 케인즈다. 그는 예술의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기초예술의 자유로운 활동을 보장해야 한다며 그 전제조건으로 내걸었던 것이 바로 ‘팔길이 원칙’이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 국장급 공무원과의 간담회에서 팔길이 원칙의 어려움을 하소연하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예술이 왜 정부지원의 특별한 위치에 있어야 하는가’를 정치권에 설득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예술을 정치적, 경제적 논리로 접근하면 할 말이 없다. 창조와 융합의 시대를 추동하는 그 원리의 근간에 예술이 개입되어야 한다는 정치권의 인식이 깨어있지 않는 한 ‘창조와 융합’은 한낱 정치적 수식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창조와 융합은 간섭과 제약을 풀어주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팔길이 원칙’이 기획, 행정, 회계 등 예술가에게 옭아맨 간섭장치에서 벗어나 표현의 자유, 창작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예술의 다양성 측면에서 적용될 때 비로소 창의와 융합의 시대의 막이 열리지 않을까 한다. 노하룡<극단 삼산이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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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팔길이 원칙의 이해](https://www.yeongnam.com/mnt/file/201905/20190515.010230757250001i1.jp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