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음악으로 위로 ‘별밤’ DJ의 LP주막, 30년 외길 이벤트 MC의 송년스토리

  • 이춘호
  • |
  • 입력 2019-12-20   |  발행일 2019-12-20 제35면   |  수정 2020-09-08
20191220
흑백톤 액자에 김민기, 나훈아, 송창식, 조영남 등 세시봉 스타의 얼굴이 찌짐집 막걸리 주전자를 배경으로 운치있게 걸려 있다. 액자 하나하나가 한 곡의 포크송 같다.
20191220
2012년 일명 ‘LP주막’으로 시작된 대구 수성구 황금동 음악이 흐르는 찌짐집의 밤. 통유리창 너머 실내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푸근한 정경도 알고 보면 대구MBC ‘별이 빛나는 밤에’ 인기 DJ 출신 사장인 유진혁만의 선곡 능력덕 이랄 수 있다.
음악이 있는 찌짐집

7년 만에 대구 수성구 황금동 ‘음악이 있는 찌짐집’을 찾았다. KBS대구방송총국 정문 남쪽길로 곧장 올라가면 김대건성당이 보인다. 100여m 못 미쳐 있는 커피숍 같은 찌짐집. 주변은 온통 아파트숲이다. 난 그곳을 ‘LP주막’이라 여긴다. 음악이 폐부 깊숙한 곳을 찌른다. 여기 음악은 하나같이 엄선돼 전등보다 ‘등불’ 같다. 한때 대구MBC FM ‘별이 빛나는 밤에’ 인기 DJ였던 유진혁이 앞치마를 두르고 그곳을 사수하고 있다. 그는 굵직한 공연기획을 리드했지만 자기 길이 아니었다. 빈 호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면서 벼랑끝 심정으로 차린 게 이 가게이다.

인기 DJ 유진혁이 앞치마 두른 찌짐집
나훈아·윤형주·이장희·김세환…
흑백톤 액자로 가득 걸린 세시봉 명사
자정 시간에 들려오는 송창식 ‘밤눈’
고개숙인 중년에 감성으로 토닥거림


12월이 되면 왠지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와 ‘별이 빛나는 밤에’의 시그널뮤직인 프랑크 프루셀악단의 ‘안녕 졸리 캔디(Adieu Jolie candy)’와 ‘머시 셰리(Merci Cherie)’가 더없이 그리워질 것 같은 분위기다. 그는 서빙하면서도 테이블에서 새어나오는 대화를 유심히 챙긴다. 이 순간 이 분위기에 딱 맞는 곡을 골라주기 위해서다. 여느 카페의 휙휙 지나가버리는 스트리밍뮤직이라면 이 가게 수명도 다한 것이라 여긴다.

기자가 도착했을 때 재일교포 여성 포크싱어인 이정미 버전의 ‘아침이슬’이 아스라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한 중년 손님은 그 음악에 취해 있었다. 조건반사적으로 술잔을 비우고 스스로 주전자를 들어 다시 한잔을 붓는다. 부모를 따라 온 아이도 그 곡을 듣는다. 하지만 그 시절 정서가 그대로 전해질 리 만무하다. 방탄소년단의 히트곡을 틀어줄 수도 있지만 유진혁은 여긴 중년의 쉼터라 선을 그었기 때문에 그냥 넘어간다. 연이어 현경과 영애, 윤연선, 방희경, 라나에 로스포, 뚜아에 무아 등 세시봉족들만 엎어질 수 있는 포크명곡을 줄줄이 방출한다. 얘기소리도 소복소복하고 정겹다. 다른 자리의 대화와 좀처럼 충돌하지 않는다. 어쩌다 옆자리와 마주치면 싱긋 미소를 보낸다.

기자는 노래를 안주 삼아 혼자 술을 마셨다. 마침 한 떼의 손님이 내 옆에 앉는다. 호감어린 포스의 한 사내가 내게 살갑게 술을 건넨다. 나도 그를 위해 주전자를 기울였다.

김민기, 나훈아, 송창식, 윤형주, 이장희, 김세환, 조영남, 그리고 전유성…. 맞은편 벽에 세시봉의 명사들이 흑백톤 액자로 걸려 있다. 한 손님은 ‘저 얼굴만으로도 이 찌짐집의 존재감은 충분하다’고 독백한다.

김정호가 부르는 ‘목포의 눈물’, 16세 때 부른 이미자의 ‘동백아가씨’, 조용필의 노래(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로 잘못 알려진 나훈아의 노래 ‘마지막 한마디’, 장계현의 오리지널 ‘나의 20년’, 사월과 오월의 ‘등불’과 ‘옛사랑’….

1991년 11월 서울음반에서 나온 송창식 명음반에 수록된 ‘밤눈’. 자정을 조금 넘은 시간, 이성이 감성으로 넘어가는 순간에 들으면 가슴은 아무도 틈입할 수 없는 자기만의 추억의 방에 갇히게 된다. 그 노래는 송창식이 가장 궁핍했고 뮤지션으로서 미래가 극도로 불투명한 상태에서 탄생했다. 꼭 감상해보길 바란다.

유진혁은 좀처럼 나서지 않는다. 그냥 내버려둔다. 그리고 흔한 라이브도 거부한다. 그냥 이어폰세상에 치직거리는 노래로 화답한다. 이제는 다들 정년의 강 앞에 선, 고생만 하고 집안에서는 제대로 대접을 못받고 있는 이 시대의 고개숙인 중년들, 그들에게 ‘정말 수고했어요’, 뭐 그런 토닥토닥의 심정으로 음악을 시그니처 메뉴인 ‘모듬전’처럼 실어보낸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20191220
30년 외길을 걸어온 이상훈 이벤트 MC. 연말연시 해넘이와 해맞이 행사 진행 때문에 가족과 오붓한 시간을 갖지 못하고 있다. 덕분에 다른 가족들의 송년은 더 넉넉하고 훈훈하게 익어간다.


이상훈 이벤트 MC


하루 행사 3개나 진행하는 송년 특수
한창 많았을때는 한달에 50건 소화
방우정 등과 함께‘MC리더스’멤버
동호회·기관단체별 진행방식 달라야
트렌드·유행어 감각도 꿰고 있어야

첫 멘트·행사 3분내 장악, 성패 좌우
예상못한 냉랭한 분위기, 빨리 수습
분위기 못 맞추는 노래는 자제 시켜
연말연시마다 양보하는 가족과 시간


29년차 이벤트 MC 이상훈(54). 그의 송년특수는 지난 11월20일부터 발진됐다. 올해의 경우 오늘이 가장 바쁘다. 오전 11시, 오후 2시, 그리고 오후 7시, 이렇게 3개 행사를 동시에 소화시켜야 된다. 한창 많았을 때는 한 달에 50건을 진행하기도 했다.

방우정, 김샘 등 17명의 지역 MC가 모여있는 MC리더스의 멤버이기도 한 그는 계명대 국어국문학과 시절에는 학생회 일에 관여하면서 운동권 근육을 단련하며 살았다.

졸업 후 교육관련 업체에서 잠시 일을 했다. 그런데 기질과 어울리지 않았다. 후배가 나섰다. “선배는 MC가 딱”이라는 한마디 때문에 1994년 덜컥 한별이벤트를 차린다. 음향, 진행, 조명 등을 앞세워 크고 작은 행사의 전과정을 진두지휘했다. 공연기획 대행사였다. 하지만 경영마인드가 없어 차린 지 3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그래서 프리랜서 MC로 변신했다.

“MC도 레크리에이션 MC와 이벤트 MC로 나눠지죠. 레크리에이션 MC는 통기타를 메고 싱어롱을 하면서 게임도 하고 선물도 주면서 행사를 장악해나가죠. 이벤트 MC는 재치있는 멘트로 좌중을 사로잡는 사람입니다. 모인 사람들은 성격, 기질, 성향, 관심사 등이 제각각이죠. 그들을 2시간 남짓 한 방향을 보면서 가게 하려면 당연히 필살기가 필요합니다. ”

현재 지역 이벤트 회사는 얼추 200여개, 이벤트 MC는 450여명. 이젠 한기웅 같은 방송인 MC도 가세를 했다. 이 바닥 선배 격인 방우정과 김샘은 요즘 행사 진행보다 특강에 치중한다. 따지고 보면 그가 지역에선 가장 오래 뛰고 있는 셈이다.

보통 자기만의 필살기를 사전에 달달 외워 진행을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는 자기만의 색깔을 분명히 했다.

“동창회라지만 그것도 초·중·고·대학교 별로 진행 방식이 달라야 합니다. 동호회, 정치인, 장애인, 특수기관단체 등에 따라 해야 될 말과 해서는 안 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을 사전에 잘 분석해야 되죠. 알력이 심해 분열 직전의 모임도 있고 누군가를 새롭게 부각시켜줘야 하는 모임도 있죠. 그걸 모르고 천편일률적으로 진행하게 되면 다신 러브콜은 없습니다.”

당연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면 꽝이다. 트렌드를 알아야 하고 주요 뉴스의 향방, 핫한 드라마, 유행어 등에 대한 감각이 떨어지면 MC의 장악력은 자꾸 추락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TV와 신문, 그리고 베스트셀러북, 잡지 등을 놓지 않는다.

◆첫 멘트가 승부처

역시 첫 멘트가 정말 행사의 성패를 좌우한다. 3분내 장악 못하면 끝날 때까지 질질 끌려다니게 된다. 며칠 전 대구 중구의사회 송년회 때 우연찮게 지인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첫 멘트를 지인 이야기로 설정했다.

“오늘 돈도 받고 안부가 궁금했던 지인까지 만나게 돼 일거양득의 날인 것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MC와 객석 사이에 친근한 연결고리가 형성된다. 그러면서 지인의 아내를 친근하게 제수씨라 부르면서 수인사도 던진다. 그럼 좌중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한테로 집중된다. 그럼 다음은 술술 잘 풀려나간다. 나중엔 그가 MC란 생각도 못하게 만들어야 된다. 벽을 없애는 것이다. 그냥 우리 식구가 진행하는 행사 같은 느낌을 계속 유지해야 된다.

대구에선 맨 앞 몇 줄은 선호를 하지 않는다. 다들 뒷자리를 선호한다. 어떤 때는 재치를 발휘해 맨 뒤로 가서 사회를 본다. 그럼 좀 어수선한 분위기가 깔끔하게 웃음 한번으로 정리가 된다. 임기응변. 그건 MC의 마지막 보루 같은 스킬이다.

가끔 에티켓이 부족해 현장에서 대놓고 통화하는 분들도 있다. 그는 막바로 그 자리로 가서 생중계를 해주기도 한다. 코믹한 면박이랄 수 있다. 요즘은 행사를 시작할 때 반가움의 손동작 하나로 좌중을 이끈다. 한 손으로 반가움을 자기 방식대로 표출하게 만든다. 당연히 모든 동작이 같지 않다. 어떤 이는 자동차 와이퍼 같은 동작을 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손을 좌우로 번갈아가며 회전시키기도 한다. 어떤 이는 여기로 오라는 듯 손짓을 하기도 한다. 그는 그것에 맞는 멘트로 맞장구를 쳐준다.

◆갈수록 술 없는 송년회

갈수록 술도 없고 노래방 타임도 없어지고 있다. 술과 행사를 자연스럽게 분리하기도 한다. 그 사이에 문화를 끼워넣는다. 그래도 일찌감치 취기를 동원하는 별난 사람은 ‘만원짜리 지폐를 건네며 근처 노래방에 가서 1시간 원없이 노래만 부르고 오라’면서 객석의 폭소를 유도하기도 한다.

가끔 예상못한 싸움도 일어난다. 정말 심각하면 행사를 잠시 중단해 자체적으로 수습하도록 유도한다. 그게 아닌 사소한 말다툼 같으면 두 사람을 양 진영으로 나눠 주기도 한다. 냉랭한 분위기에 온기를 집어넣기 위한 방편이다.

건배사도 세월따라 많이 달라지고 있다. 예전에는 판박이 건배사가 많이 유행했지만 요즘은 퇴조하고 있다. 그가 괜찮은 건배사를 예시해준다.

“요건 방우정 선배가 개발한 건데, 예전 영화 ‘명량’의 이순신 출정 멘트를 패러디한 거예요. 제안자가 ‘전국 출정하라’고 하면 다른 사람들은 발을 구르며 환호성을 지르는 수군처럼 우우우 와와와를 외치게 한다. 최근에는 ‘아자 아사 아사’도 유행한다. ‘아름다운 자리에서 아름다운 사람들과 아름답게 사랑하자’란 의미. 그래서 ‘하나 둘 셋’도 건배사로 인기가 좋다. 뜻이 너무 심오하면 역효과를 불러들인다.

노래타임 때도 분위기 죽이는 곡은 가급적 못 부르게 해줘야 한다. 가곡, 군가는 물론 임재범의 ‘고해’같이 고난도 기량이 필요한 곡은 잘 부를수록 마이너스 효과를 얻는다. 이럴 때는 적당히 쿵짝 분위기가 최고다. 우연이의 ‘우연히’, 그리고 김연자의 ‘아모르 파티’ 등은 부르면 단번에 좌중을 뒤집어버린다.

엔딩곡은 뭐가 좋을까.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밀어낸 곡인 노사연의 ‘바램’.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란 그 멋진 가사 때문에 송년회 피날레 곡으로 인기짱.

그의 연말연시는 가족과 함께 하기 어렵다. 다른 가족의 즐거움과 행복을 위해 자신은 잠시 가족과 멀어져 있는다. 이 바닥 유명 MC의 명성이랄까. 12월31일에는 타종식, 그리고 내년 1월초 신년회 관련 이런저런 행사를 쳐내고 나면 그에게 잠시 재충전의 시간이 온다.

그는 9년간 대구FC 경기가 있을 때 코믹한 축구 현장해설가로도 인기를 얻었다.

있으면 그 존재를 좀처럼 실감 못하지만 없으면 송년 행사가 흔들거린다. 그래서 그는 지금도 발이 아니라 말로 송년무대를 주름잡을 수 있는 것이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