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석의 電影雜感 2.0] '소리도 없이' 홍의정 괴물 신인 감독의 탄생

  • 유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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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0-23   |  발행일 2020-10-23 제39면   |  수정 2020-10-23
"박찬욱·봉준호·이창동 감독이 떠오르지만 조금도 같지 않은 놀라운 연출"

소리도.없이_poster
'소리도 없이' 포스터.
소리도.없이_촬영현장
'소리도 없이' 촬영 현장.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과거에는 볼 수 없었던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국영화계의 대표적인 텐트폴 시즌인 추석 연휴에 맞붙은 영화가 '국제수사' '담보'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이었다. 5일 동안 연휴가 이어졌음에도 총관객 수가 180만명밖에 되지 않았다. 세 편 가운데 그나마 가장 큰 기대를 모았던 '국제수사'는 오히려 완성도와 오락성이 가장 떨어졌고, '죽지 않는 인간들의 밤'은 취향을 탈 수밖에 없는 B급 유머를 구사하는 감독의 작품이라 전형적인 신파극이었음에도 가족 단위로 볼 수 있었던 '담보'가 겨우 체면치레를 한 셈이다. 제작비가 모두 100억원을 훌쩍 넘는 '영웅' '승리호' '싱크홀' 같은 대작들이 여름에 이어 추석 시즌까지 개봉이 좌절되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대로 가면 2020년은 범작과 망작들의 해로 기억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이어졌다. '소리도 없이'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 우려는 현실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홍의정감독
홍의정 감독

범죄조직 하청 성실한 청소부 두 남자
완벽한 캐릭터 연기 유재명과 유아인
힘겨운 코로나 극장가 보석같은 작품

상당히 무겁고 폭력적 상황 그리면서
윤리적 태도까지 놓치지 않고 담아내
견고하며 독창적 이야기꾼 여성 감독

'소리도 없이'의 연출을 맡은 홍의정 감독은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을 마치고 2년간 영상광고 제작 프로덕션에서 프로듀서와 조감독을 맡아 여러 광고와 뮤직비디오를 제작 진행했다. 이후 2012년 영국 런던필름스쿨 영화과를 졸업하고 현지에서 다수의 단편영화와 광고 연출을 했다. 홍 감독이 국내 영화계에서 처음 주목받았던 작품은 '서식지'로, 2018년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던 17분짜리 단편 영화였다. 시놉시스는 다음과 같다. "갑작스러운 통일로 경제 대공황을 겪고 있는 한반도. 늙은 노동자 찬기는 중국에서 아들이 최신형 전화기를 택배로 보내오자 전화기 작동법을 몰라 이웃의 도움을 구하게 된다." 봉준호 감독과의 연이은 작업으로 관객들에게 익숙한 배우 변희봉을 비롯해 서동수, 조하석, 채드박이 출연했다. 갑작스러운 통일로 경제 대공황을 겪고 있는 한반도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가운데 조하석은 '소리도 없이'에서 두 주인공에게 새로운 제안을 하는 역으로 홍 감독과 연이어 작업한다. 통일을 가정한 근미래물로 최근 급격한 변화를 맞고 있는 남북관계 속에서 뜻밖의 리얼리티를 구축한다. 설정과 디테일을 보강해 장편으로 만들어도 충분히 흥미로운 작품이었을 것이다.

지난 15일 개봉한, 홍의정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 될 '소리도 없이'(2020)는 범죄 조직의 하청을 받아 성실하게 시체 수습을 하며 살아가는 두 주인공이 어느 날 조직의 실장의 부탁으로 유괴된 11세 아이를 억지로 떠맡게 되었다가 메인 포스터의 카피처럼 "계획에 없던 유괴범"이 되어버리면서 예기치 못한 사건에 휘말리는 이야기를 그렸다. 이 작품은 앞서 2016년 '베니스 비엔날레 칼리지 시네마' 최종 후보작으로 선정되면서 주목을 받기도 했는데, 이것은 첫 번째 혹은 두 번째 장편영화를 연출하는 감독을 선정해 베니스국제영화제가 제작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당시 '소리도 없이'와 함께 최종 후보작에 오른 작품 가운데 평단의 호평을 받은 바 있는 알리 압바시 감독의 '경계선'이 있었다고.

배우 유아인은 범죄 조직의 '소리 없는 청소부' 태인 역을 실감 나게 그리기 위해 삭발은 물론 체중을 15㎏이나 증량하며 지금까지 관객들이 한 번도 본 적 없는 캐릭터로 분했다. 거기다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태인은 영화 내내 한마디의 대사도 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소리도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지만 대사를 대신해 섬세한 눈빛과 세밀한 몸짓으로 모든 감정을 표현하면서 관객들의 시선을 붙들어 맨다.

배우 유재명은 범죄 조직의 '신실한 청소부' 창복 역을 맡아 유아인과 함께 영화의 중심을 단단히 버티고 서있다. 범죄를 돕는 일이 익숙해져 버린 이 신실하고 성실한 창복을 제대로 연기하기 위해 유재명은 허름한 옷차림과 친근한 말투로 다리까지 절며 캐릭터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말 대신 행동으로 모든 걸 표현하는 태인과는 반대로 행동보다 말이 더 많은 창복은 오랜 연극 생활로 다져진 유재명이 아니면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초희 역을 맡은 배우 문승아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문승아는 지난해 5월11일 폐막한 제20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김솔·이지형 감독의 '흩어진 밤'에서 수민 역을 맡아 성인 연기자들을 제치고 당당히 배우상을 수상한 바 있다.(참고로 남성 수상자는 지역 출신이기도 한 최창환 감독의 '파도를 걷는 소년'에서 김수 역을 맡은 배우 곽민규였다) 당시 사회자가 앞으로도 배우 일을 계속 하고 싶은지 묻자 이 당찬 아역 배우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저 혼자 연기 안 하고 다 같이 함께 울고 웃는 그런 배우가 되고 싶다"고 대답했다고. '소리도 없이'에서도 유재명이 퇴장한 뒤에도 유아인과 함께 극을 끝까지 함께 이끌며 놀라운 순간들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소리도 없이'는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이창동 감독의 어떤 작품들을 묘하게 떠오르게 하면서도 이 모두와 조금도 같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또한 유괴나 시체 유기 같은 범죄를 다룬 그 어떤 장르물과도 공통점을 찾기 어렵다. 상당히 무겁고 폭력적인 상황을 그리면서도 윤리적인 태도를 놓치지 않는 연출은 2000년대 초 난폭한 영화를 만들었던 일군의 남성 감독들과 크나큰 대비를 이룬다. 홍 감독은 데뷔작에서 이미 자신만의 인장을 확보한 것이다.

'기생충'의 아카데미 수상 소식의 기쁨도 잠시, 코로나19 사태에 휘청거리는 한국 영화계에 모처럼 내리는 단비처럼 반가운 '소리도 없이'가 좀 더 많은 관객에게 닿았으면 한다. 기존 상영영화의 문법에 익숙했던 관객들에겐 낯설 수도 있겠으나 영화가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가 작지 않다. 특히 선과 악을 너무나 쉽게 재단하는 요즘을 돌아보면 더욱 그렇다. (감독이 원래 생각했던 제목은 '소리도 없이 우리는 괴물이 된다'였단다) 이제부터 홍의정 감독의 이름 석 자를 기억하는 것이 좋겠다. 클리셰를 벗어난 장르물을 만들 줄 아는, 견고하고 독창적인 이야기꾼 여성 감독을 만나기까지 이만큼 시간이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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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 물레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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