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양탕국

  • 이윤경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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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4-13 07:48  |  수정 2021-04-13 07:50  |  발행일 2021-04-13 제15면

이윤경
이윤경 〈아동문학가〉

그 집에는 커피가 없답니다. 대신 이름도 낯선 양탕국을 마셔보라 권합니다. 아! 양탕국은 아무것도 넣지 않은 커피였습니다. 100여 년 전 처음으로 서양의 커피를 접한 사람들이 커피의 쓴맛과 검은색이 서양에서 온 탕약 같아서 그리 불렀답니다. 이젠 누구나가 물 마시듯 즐기는 음료가 됐습니다. 거리마다 크고 작은 예쁜 상점들이 서양 탕약을 팔고, 음료회사들은 잘 생기고 인기 좋은 배우들을 모델로 내세워 광고를 합니다. 서양 탕약은 이제 없어서는 안 되는 기호품이 되었습니다. 향도 좋고 기분도 좋고 머리도 맑아지니 제게는 약이 맞는 듯합니다.

뜨거운 양탕국 한 잔을 손에 들고 계단을 오릅니다. 푸른색 지붕과 기둥에 오얏꽃이 장식된 아름다운 서양식 건물을 향해 곧장 걷습니다. 그 집의 이름은 덕수궁 정관헌(靜觀軒)입니다. 조용히 내려다보는 집이랍니다. 조용히 내려다보기에 더없이 좋은 자립니다. 웅장한 중화전과 화려한 석조전에 가려있지만 아담하고 고아한 운치가 있는 곳입니다. 그 집은 그때의 왕이 양탕국을 마시며 연회를 즐기던 곳이었다고 합니다. 황제라 불렸으나 주권과 통치권을 빼앗기고, 백성들을 나라 없는 식민지의 곤궁한 삶으로 떨어지게 한 슬픈 왕입니다. 왕이 머물던 그때나 지금이나 궁궐의 높다란 담장 밖 세상은 여전히 시끄럽습니다. 패를 가르고 구호가 난무합니다. 나라는 혼란스럽고 백성들은 여전히 살기 어렵다고 합니다. 외세의 간섭이든, 정치적 분란이든, 경제적 어려움이든, 전염병의 창궐이든, 혼돈의 시대는 도무지 끝나지 않습니다.

한 김이 빠진 양탕국을 마십니다. 정관헌의 푸른 기둥에 기대어 마시는 양탕국은 다른 날보다 향기롭지만 맛은 더 씁쓸합니다. 역사는 되풀이된다고 합니다.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도 그것이라 생각합니다. 정관헌 화려한 의자에 앉아 양탕국을 마시며, 그저 조용히 내려다보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한 왕의 이야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 나라와 백성들이 감당해야 하는 슬픔과 비극을 지금 푸른 지붕에 사는 분들은 잘 알고 계시겠지요.

양탕국이 식었습니다. 조용하지 않은 날 찾아온, 조용히 내려다보는 집에서 양탕국 때문에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겨보았습니다. 좀 조용해진 어느 날 다시 찾아오려 합니다. 그때 저랑 조용하게 양탕국 한 잔하시겠습니까?

이윤경 〈아동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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